뤼순은 감옥 아닌 ‘살육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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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은 감옥 아닌 ‘살육의 현장’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1.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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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후 韓中지사 700여 명 처형
교수형 뒤엔 나무통에 넣어 야산에 버려

뤼순감옥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다. 거대한 고문공장이고 살육의 현장이다. 바깥 날씨도 추웠지만 감옥 내부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흘렀다.

   
▲ 일제가 사상범들을 고문했던 형틀과 고문도구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 이곳에 수감했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을 당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고문실에는 인신을 얽매었던 형틀과 각종 고문기구, 족쇄 등이 전시돼 있다. 일제의 잔학상은 밥을 퍼주던 계량용기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국자처럼 생긴 주걱 안에 크기가 다른 7개의 나무 추를 넣어가며 식사를 줬다는데, 죄형에 따라 크기가 큰 추를 집어넣어 식사 제공량을 제한한 것이다.

   
▲ 교수형에 처한 시신은 나무통에 구겨넣어 암매장했다.
일제의 잔혹성에 치를 떨게 만드는 것은 사형장과 공동묘지다. 일제는 수감자들을 교수형으로 처형했는데, 별도의 관을 마련하지 않고 처형된 시신이 좁은 원통형 나무통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야산에 매장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시신은 통속에 구겨진 채 야산에 빼곡하게 매장됐는데, 깊이 묻지 않아 산짐승의 먹이가 되는 등 훼손이 극심했다고 한다.

현재 뤼순감옥 안에는 1971년 공동묘지 발굴당시의 사진은 물론 공동묘지의 일부가 자리를 옮겨 재현돼 있다. 안중근 의사도 1910년 처형된 뒤 이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2008년 3월 남북이 공동으로 유해 찾기에 나섰으나 실패한 바 있다. 안 의사는 나무통이 아닌 소나무 침관과 함께 묻혔으나 별도의 확인 표시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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