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베이징에 울린 하늘북
상태바
단재…베이징에 울린 하늘북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1.22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심개발로 사라져가는 단재 흔적 곳곳 확인

단재 망명루트를 따라 
만주에서 베이징까지②

 

   
▲ 단재선생이 베이징에 도착해 4년여 동안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스팡지에 21호.
1월5일 다롄(大連)시 뤼순(旅順)구에 있는 뤼순감옥을 답사한 단재문화제전추진위원회 역사기행단은 6일 단재에게 대고구려사상을 심어준 통화(通和), 지안(集安) 일대의 고구려 유적(2월6일자 565호에 ③편 게재 예정)을 돌아본 뒤 3층 침대칸 기차를 타고 15시간을 달려 7일 오후 1시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기행단은 9일 오전까지 베이징에 머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이 실천적 사상가로서 활동했던 삶의 흔적들을 좇았다. 하지만 선생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거주지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데다 급속한 도심개발로 후통(胡同·골목이라는 뜻의 몽골어음을 빌려 쓴 단어)들이 파괴되고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동북지방 군벌이었던 장쭤린(張作霖)의 아들인 장쉐량이 단재 등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게 활동의 근거지를 제공했다는 사실과 그 위치를 직접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학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단재가 북경일보 등 중국 언론에 논설을 기고하면서 각종 역사서 등을 집필한 곳으로 추정되는 스떵안(石燈庵)이 있던 장소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밖에도 단재선생이 베이징에 처음 도착해 자리를 잡았던 진스팡지에(錦什坊街), 박자혜 여사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 2년을 보냈으며 천고(天鼓)의 집필지인 챠오떠우후통(炒豆胡同), 부인과 아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빈한한 세월을 보냈던 따헤이후후통(大黑虎胡同) 등을 둘러봤다.

이 가운데 장쉐량의 저택과 진스팡지에 등은 머지않아 헐릴 것으로 알려져 보존은 불가능하더라도 역사적 고증작업이 시급한 상황이다.

‘꿈하늘’이 태어난 진스팡지에(1914~1919)
소설·역사서 창작, 신문 논객활약 등 집필의 터전

   
▲ 이 집에 살고 있는 노인(오른쪽)은 1951년 이사를 왔을 때 기와집 한 채가 있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모두 새로 지은 것이라고 증언했다. 왼쪽은 허원 교수.
1914년이 저물어가는 무렵 베이징에 청포(청나라식 도포)를 입은 조선 선비가 나타나는데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1910년 망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상하이 등에 머물던 단재 선생을 베이징으로 부른 사람은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었다. 상하이의 파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부름에 응해 베이징을 새로운 독립운동의 무대로 선택한 것이다.

최옥산 중국대외경제무역대학 교수(조선족)는 단재문화제전추진위원회가 주최한 ‘단재와 베이징 심포지엄(2008년 12월17일 서원대 미래창조관)’ 주제발표를 통해 “처음 북경에 도착한 단재는 이회영·시영 가족이 살고 있던 진스팡지에에 거주하면서 이들과 가까이 지냈다. 단재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잠시 상하이로 떠났던 1919년 초봄까지 진스팡지에에 머물렀다”고 고증했다. 진스팡지에는 명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자금성의 서쪽 북해공원 옆에 위치해 있다.

중국전문 여행사인 알자여행의 대표이자 전직 기자의 소질을 살려 그동안 단재의 망명생활에 대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기도 했던 조창완 대표의 안내로 단재가 거주했던 장소로 유력한 진스팡지에 21호를 찾아냈다.  

옛집 1951년에 허문 사실 확인
조창완 대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진스팡지에의 골목 안쪽이 사라지고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단재선생이 거주했던 진스팡지에의 초입도 곧 개발이 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 이곳에서 단재가 살았던 집은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사합원 형식의 큰집들 사이 이런 뒷골목에 거처가 있지 않았을까?
단재가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21호도 후통의 대부분 주택들이 그러하듯 고풍이 느껴졌지만 확인 결과 단재가 거주할 당시의 주택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1호에 거주하는 팔순의 중국노인은 “1951년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는 낡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부수고 모두 새로 지었기 때문에 옛날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단재는 진스팡지에에서 4년여에 걸쳐 머물며 역사, 문학저술에 몰두했다. 1914년 대종교 간부의 요청으로 옛 고구려 땅을 답사했던 터라 넘치는 영감이 집필에 전념케 했을 것이다.

실제로 1916년에 쓴 단재의 대표소설 꿈하늘은 단재 자신이기도 하고, 조선의 개개 민중이기도 한 ‘한놈’이 등장해 국난을 이겨낸 역사의 현장을 보여준다.

스떵안 자리를 찾아내다(1918 집필처)
거주민 “한국의 항일전사가 머물렀다더라”

   
▲ 챠오떠우후통은 중국정부가 보존하려는 대표적인 후통이다. 사진은 몽골군왕 성거린친의 집이었던 승왕부.
베이징의 단재는 중국의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했고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집필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집필 장소로는 베이징의 사찰들을 이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단재는 1924년 꽌인스(觀音寺)에서 6개월 동안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후 아나키스트 이필현과 함께 파통스(法通寺)에서 살았다는 것이 공판기록에도 나온다.

단재의 집필 장소로 유명한 곳 가운데 하나가 스떵안(石燈庵)이다. 최옥산 교수는 심포지엄에서 “단재는 저술활동에 몰두하던 중 1918년 스떵안이라는 작은 암자에 머물기도 했다. 이 절은 원나라 때 세워진 절인데 인근에 타이핑후(太平湖·호수)를 끼고 있는데다, 1910년대의 주지였던 웨천(越薦)스님이 한가한 방들을 싼값에 임대해 수많은 중국의 문인학사들도 이곳을 이용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옌지(延吉)에 있는 최 교수와의 전화통화에 힘입어 스떵후통의 위치를 확인한 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스떵안이 있던 장소를 찾아냈다. 한 70대 할아버지는 “20여 년 전까지도 스떵안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며 그 자리를 지목했다. 그러나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 때문에 암자는 물론이고 그 유명하던 타이핑후마저도 자취를 감춘 상황이니 옛 모습을 짐작키는 어려웠다.

그런데 스떵안 자리 바로 옆에 사는 40대 남자가 뜻밖에도 “이곳에 ‘한국인 항일전사가 머물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해 기행단을 들뜨게 했다. 그 항일전사가 단재선생이든 아니든 독립운동가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였으리라는 짐작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신혼의 단꿈과 하늘북, 챠오떠우후통(1920~1922)
결혼과 득남, 월간지 ‘천고’ 발행 등 각별했던 장소   

   
▲ 단재가 집필 장소로 활용했던 암자인 스떵안의 위치를 찾았으나 옛날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단재 선생에게도 범부의 행복이 있었다면 챠오떠우후퉁(炒豆胡同)에서의 짧았던 2년이었을 것이다. 감히 그렇게 생각해본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충북)에 피선되고 ‘신대한’을 창간해 주필로 활동했으나 결국 또 다시 실망감만 안고 1920년 4월 베이징으로 돌아온 단재는 이회영(이시영 선생의 형·1932년 고문 끝에 옥사) 선생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박자혜 여사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42살이 되던 이듬해 장남 수범씨를 낳았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또 이 시기에 거의 혼자 손으로 논설, 국내독립운동 소식, 내국시문, 해외잡감 등 다양한 내용을 묶은 순한문 월간지 ‘천고(天鼓)’를 발행한다. 천고는 현재 북경대 도서관 희귀본 서고에 일부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열람이 극히 제한적이다.

단재는 또 이곳에서 군사통일주비(軍事統一籌備)에 참석하고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성토문을 기초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챠오떠우후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곳은 황제의 거처인 쯔진청(紫禁城) 북동쪽에 있는데 황제가 되지 못한 아들들과 고위관료들의 집들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고관대작의 집들 뒤 허름한 골목에

   
▲ 따헤이후후통 시절 단재는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아내 박자혜와 장남 수범을 환국시키고 홀로 남아 역사연구를 지속했다. 사진은 모습이 크게 변한 후통 입구.
그러나 대문 안에는 소위 사합원(四合圓·건물이 마당을 사면으로 둘러싼 형식)이라고 불리는 과거 대저택의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또 다시 후통 형태의 골목과 게딱지처럼 납작한 집들이 처마를 서로 맞대고 있다.

항상 가난한 살림을 꾸려야 했던 단재선생 역시 이 같은 다세대 주택 어딘가에서 박자혜 여사와 신혼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집에서 단재가 생활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선생이 자신이 기거한 골목의 이름은 밝혔지만, 번지수는 그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망명객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옥산 교수는 “1919년 작품으로 알려졌던 ‘백세노승의 미인담’에 등장하는 몽골 장수의 집에 대한 묘사가 바로 이 챠오떠우후통에 있는 몽골군왕 성거린친(僧格林沁)위 집 승왕부를 그린 것 같아 이 무렵에 쓴 소설이 아닐까 싶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망명 10년째인 이즈음 선생의 심경은 유고시 ‘1월28일’에서 엿볼 수 있다. “열 해를 갈고 가니 칼날은 푸르다마는 쓸 곳을 모르겠다/춥다한들 봄추위니 그 추위가 며칠이랴/자지 않고 생각하면 긴 밤만 더 기니라/푸른 날을 쓸 곳 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해 우노라(부분)”

조선혁명선언의 산실 따헤이후후퉁(1922~1924)
처자를 환국시킨 빈한한 세월 속에 아나키즘 확립

   
▲ 1900년 영·미·일 등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침입했을 때 일본군에 의해 꾸러우의 북이 찢겨졌다. 중국인들은 꾸러우를 ‘밍츠러우(明恥樓)’라고 부르며 분노를 되새기고 있다.
원·명·청나라 시기의 베이징의 일상은 새벽 5시 쫑러우(鐘樓)에서 울리는 ‘아침종’으로 시작돼 저녁 7시 꾸러우(鼓樓)에서 울리는 ‘저녁북’으로 끝을 맺었다. 베이징의 오래된 전통은 1924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자금성을 떠나면서 중단됐다. 꾸러우는 근대 이후 베이징의 아픔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꾸러우 동쪽 맞은편에 조그만 골목이 있는데, 이곳이 ‘따헤이후후퉁(大黑虎胡同)’이다. 단재는 극심한 생활난에다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챠오떠우후통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며 부인 박자혜 여사와 장남 수범씨를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승용차 한 대도 들어가기 힘든 비좁은 골목, 지금은 외벽마저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허름한 건물들, 그리고 한두 평이 되나마나한 방들이 다세대를 이루고 있는 따에이후후퉁의 풍경은 예나지금이나 이곳이 도시 최하층민들의 삶의 터전임을 느끼게 한다. 당시 단재의 생활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미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리스쩡, 리따쟈오 등과 교류
혹독한 경제난은 힘든 나날 중에도 단재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천고의 발행마저 더 이상 꾸려나갈 수 없게 만든다. 1921년부터 정열적으로 추진하던 국민대표대회도 파벌갈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다.

단재는 그러나 이 혹독한 시절을 견뎌내며 더욱 투철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변모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리스쩡(李石曾), 중국사회주의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리따자오(李大釗) 등과 사귀며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구상했다.

최옥산 교수는 “단재는 이 시기에 에스페란토(폴란드인 자멘호프가 만든 국제보조어)를 배우며 리스쩡의 소개로 루쉰(魯迅), 쪼우쭤런(周作人), 루쉰의 집에 기거하던 러시아인 예로생꼬 등과 긴밀하게 접촉했던 정황이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기념할만한 가장 역사적인 사실은 단재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는 것이다. ‘의열단 선언’이라고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의 집필은 항일폭력단체인 의열단의 약산 김원봉이 베이징의 단재를 찾아와 투쟁강령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단재는 이를 통해 “민중은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내정 독립’ ‘참정권이나 자치운동’은 물론 ‘외교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면서 ‘민중 직접 폭력혁명론’을 주창한 것이다. 또 전통선비였던 단재로 하여금 무정부활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 발행이라는 실천적 행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