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서는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혼(魂)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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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서는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혼(魂)이여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2.04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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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단재 만주 돌아보고 대고구려사상 정립
200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후 대대적 정비

<단재 망명루트를 따라 만주에서 베이징까지③>
1910년 4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서인 동사강목 한 권을 들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의 상하이, 베이징 등에 머물며 실천적 사상가이자 언론인, 역사학자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단재 선생의 행적 가운데 가장 분명한 고증이 이뤄진 것은 역사가(歷史家) 단재다. ‘조선상고사’ 등 그의 자주적 사관을 뚜렷하게 말해주는 구체적 저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웅이 필요했던 암울한 시대에 영웅을 배출할 조건이 국민적 역량이고, 강한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역사가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난 1월4일~9일까지 단재의 망명루트를 답사한 단재문화제전추진위 답사팀은 5일 오후 뤼순감옥을 돌아본 뒤 6인1실 3등 열차로 밤새 만주 벌판을 달려 통화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지안(集安)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돌아봤다. 지안은 고구려가 424년 동안 두 번째 수도로 삼았던 국내성이 있었던 도시다.

단재는 1914년 대종교 종사 윤세복의 초청으로 봉천성 환인현에 1년 동안 머물며 고구려 유적을 돌아봤는데, “한 번 본 지안이 김부식의 고구려본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표현했을 정도이니 그 감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미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단재는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 1920년대 중반까지 연구와 저술을 일단락 한다. 

이번 호에서는 중국이 200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이후 중국의 국가급 경관지구로 대대적으로 정비작업을 벌이고 있는 지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사진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잔해만으로도 웅장한 대고구려

   
환도산성은 유리왕 22년(서기 3년)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해발 676m 환도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있다. 조선족 안내원은 “전돌로 성을 쌓는 중국과 달리 거대한 돌을 다듬어 ‘육각 쌓기’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성벽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절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산성 안에는 2004년부터 중국이 발굴하기 시작한 궁궐터가 있다. 외침이 있을 경우 국내성을 대신해 수도역할을 했던 곳인데, 342년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의 침입으로 불탔다고 한다. 환도산성을 둘러싼 봉우리의 바깥쪽은 절벽이기 때문에 남쪽 성문만 지키면 되는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안내원은 “저 산봉우리 능선을 한 바퀴 도는데 14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밝혔다.   

국가급 여유경구로 거듭나다

   
환도산성 입구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과 중국의 국가급 여유경구(旅遊景區)로 지정된 사실을 알리는 표석이 서있다. 지안이 고향인 안내원은 “어렸을 때는 고구려 산성인지도 모르고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2004년 유네스코 지정 이후 안에 살던 농민들을 내보내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했다. 연변대를 졸업했는데 역사교재에 ‘중국 변방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단한 줄만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유적지에서 만난 중국 상인

동북지방은 추위 때문에 겨울에 유적지의 문을 닫거나 거의 관광객이 없다. 환도산성과 귀족 무덤군이 있는 입구에 답사단이 도착하자 어디선가 새콤한 산(山)열매에 설탕옷을 입힌 꼬치를 파는 상인이 나타났다. 장수왕릉 앞에선 산삼을 파는 중국인이 서툰 우리말로 수작을 걸기도 했다. 동북항일연합군을 기리는 ‘양정우 능원’에서 본 항일전사들의 복장과 너무 닮았기에 기념촬영을 했다.  

무너져 내린 자존심 국내성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둘레는 2775m에 달했다는데, 현재는 중국 동북해방전쟁과 아파트 공사로 인해 약 400m만 동성가(東盛街) 도심 한가운데 남아있어 마치 아파트 단지 옆 화단처럼 보인다. 국내성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고 7m에 이르는 성벽의 높이도 1980년대 이후 3m로 낮아졌다. 경사가 가파른 쪽이 성 바깥이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다.

이제는 장군총이 아니라 장수왕릉

지안

   
현에는 약 1만2000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동양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지며 과거 장군총으로 불렸던 사진의 무덤은 장수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아 현재는 장수왕릉으로 부른다. 평평한 꼭대기에서 기와와 주춧돌이 발견돼 누각이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1100개에 이르는 돌로 쌓았고, 천장돌은 50톤에 이른다. 너비 33m, 높이는 13m에 달한다. 

조작과 훼손에도 우뚝한 호태왕비

장수왕릉과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두 무덤 사이에는 광개토대왕비가 오벨리스크처럼 서있다. 보호각은 유리로 둘러쳐져 있는데 중간에 알루미늄 기둥이 서있어 밖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쉽지 않다. 중국 관리인은 내부 사진촬영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 비석은 일본인들이 이끼를 없애려 쇠똥을 발라 태운데다 석회를 이용한 탁본 등으로 크게 훼손됐으며, 글씨를 조작한 의혹도 있다.

얼지 않는 압록강 그러나 겨울

   
지안시내에서 바라본 압록강 너머에는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북한 만포시가 있다. 산을 경작지로 개간함에 따라 민둥산이 돼버려 더 수해가 잦다고. 지안이 고향인 조선족 안내원은 “어렸을 때 겨울이면 압록강이 얼어 북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강줄기가 국경이기 때문에 강 위에서 노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95년 운봉수력발전소가 생기고 난 뒤로는 압록강이 얼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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