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 단재에서 민족의 단재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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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단재에서 민족의 단재로 돌아오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2.18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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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버린 1972년 사적비 다시 세우기로 합의
새로 세운 묘정비엔 ‘조선혁명선언’ 새기기로

단재 사적비 논란 최고의 결정
지난해 5월 고령 신씨 문중이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역을 재정비하면서 불거졌던 이른바 ‘사적비 논란’이 극적으로 마무리 됐다.

   
▲ ①화장실 옆에 방치된 1972년 사적비를 제자리에 다시 세우고,②지난해 새로 세운 묘정비는 표면을 깎아 ‘조선혁명선언’을 새긴다. ③1941년 한용운 등이 세웠으나 폐가에 방치된 묘표비도 무덤 앞 원위치. ④지난해 합폄으로 새로 세운 신채호·박자혜 묘표는 박자혜 묘표비로 만들어 신채호 묘표비 옆에. ⑤지난해 새로 만들었으나 후손이름을 잘못 새긴 상석은 이름을 지우고 그대로 사용.
묘소 이전과 단재의 부인인 박자혜 여사와의 합폄(유골 없는 합장) 과정에서 1972년 단재의 장남 수범씨(1991년 작고)가 건립한 사적비 대신 문중사 중심의 새로운 묘정비를 세우고, 1941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세운 묘표비마저 폐기하는 등 ‘민족의 단재인가 문중의 단재인가’하는 논란(본보 559호.2008년 12월19일자, 566호 2009년 2월13일자)을 불러온 가운데, 사적비와 묘표비를 원위치하고, 새로 세운 묘정비에는 단재의 사상을 오롯이 드러낸 명문(名文) ‘조선혁명선언’을 새겨 재활용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같은 대합의는 2월13일 단재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와 고령 신씨 문중 대표, 단재기념사업회, 단재문화제전추진원회, 청원군 관계자 등 12명이 참석해 열린 연석회의에서 이뤄졌다.

“글자 틀려도 사적비 다시 만들진 않아”
고령 신씨 문중이 지난해 3500만원을 들여서 석물을 정비한 것은 72년 사적비 가운데 일부 오자(誤字)가 있고, 합폄을 한 만큼, 박자혜 여사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묘표비를 세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이날 회의에 참석한 문중대표들은 한 목소리로 “글자가 잘못돼 다시 만든 것이다. 돈이 남아돌아서 한 일이 아니다. 후손들이 마음이 우러나서 한 일인데 성의도 생각해야지. 옛날 비석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따라서 “한발 물러서 양보를 하더라도 옛 사적비와 새 묘정비를 같이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와 고령 신씨 문중, 기념사업회, 단재문화제전추진위 관계자 등 12명이 2월13일 청원군청에서 만나 선생의 묘소 주변에 조성한 석물의 위치 이전과 관련해 협의했다.
그러나 이덕남 여사와 문화제전 추진위의 입장은 확고했다. 문화제전 추진위 허원(서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공동대표는 전문가의 견해임을 내세워 “사적비는 글자가 틀리거나 내용에 오류가 있어도 웬만하면 다시 세우지 않을뿐더러 틀린 글씨를 고치는데도 인색하다. 72년 사적비는 이은상, 송건호 선생 등이 참여하고 지역의 국어학자인 조건상 선생이 꼼꼼하게 비문을 써 당시의 높은 수준을 반영한 것이다. 연구가 진행돼 해석이 달라졌다고 갈아치워서는 안 된다. 더구나 두 개의 비석을 한 자리에 세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덕남 여사도 “광개토대왕비는 글자가 마모됐어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됐다. 글자가 틀렸다고 뽑아버릴 수는 없다. 단재는 이미 우리 아버지가 아니다. 국가의 아버지가 됐다. 나도 힘들다”고 거들었다.

청원군 관계자는 “두 비석을 한자리에 세울 수 없다면 새로 세운 묘정비를 인근 주차장에 옮겨 세우면 어떻겠냐”며 나름대로 중재안을 내놓기도 했다.

“묘정비 세울 때 사회적 합의 필요했다”
신채호 선생이 문중만의 단재가 아니라는 데 먼저 의견이 모아졌다. 신희원 문중대표는 “사실 그분은 국가의 위인인데 타성(他姓)이 위해야지 우리만 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묘정비를 새로 세울 때 두루두루 협의가 된 줄 알았는데, 너무 경솔하게 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고령 신씨 종약회 신충수 총무도 “봉분도 너무 크게 했다. 벌초하려면 사다리라도 놓고 해야 할 판”이라며 묘역 정비를 추진함에 있어 위용에만 치중한 점을 지적했다.

결국 이모저모를 고려할 때 과거의 사적비를 제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정비를 재활용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비석 재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당초 이덕남 여사가 ‘단재의 시비를 세우자’고 제안해 왔으나 표면을 갈아내고 조선혁명선언을 새기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귀래리 단재 기념관 앞에 ‘천고(天鼓)’ 시비가 이미 세워진 마당에 이왕이면 단재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조선혁명선언의 6400여자 전문을 새기자”는 문화제전 추진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

문화제전추진위 김승환(충북대 국어교육과 교수) 공동대표가 “석물 재정비에 필요한 예산을 문화제전추진위가 나서서 마련하겠다”고 밝혔고 문중이 이에 동의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이밖에 한용운 선생이 세웠으나 합폄 과정에서 제거된 묘표비(丹齋 申采浩之 墓)도 제자리에 세우고 그 자리에 새로 세운 합폄 묘표비는 표면을 갈아내 박자혜 여사의 묘표비(婦人 朴慈惠女史之 墓)로 재활용하기로 합의했다. 또 지난해 새로 만들었으나 후손이름을 잘못 새긴 상석은 이름을 지우고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본보 단독 발굴]
뤼순감옥에 단재 흉상 세운다
안중근· 이회영 선생 등 3인 한자리에

1936년 뤼순감옥에서 옥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흉상이 오는 8월 뤼순 현장에 세워질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에서 일시 귀국한 이덕남 여사는 2월13일 충청리뷰와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 루쉰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에게 의뢰해 아버님의 흉상 제작에 들어갔으며, 오는 8월쯤 제막식을 갖게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또 “흉상제작에 드는 비용은 김원웅 전 국회의원의 소개로 알게 된 SK에너지 중국 현지법인의 간부인 K씨가 전액 희사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 여사에 따르면 단재 흉상 외에도 역시 뤼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도마 안중근 의사(1910년)와 고문 끝에 옥사한 우당 이회영 선생(1932년)의 흉상이 한 자리에 세워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영 선생은 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6형제가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단재와 박자혜 여사를 중매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1932년 일본군사령관을 암살하려다 일경에 체포됐으며 고문 끝에 옥사했다.

이회영선생기념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해 11월 흉상 제작을 마쳤으며, 제막 장소와 시기에 대해 뤼순감옥 측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관계자도 “안 의사의 흉상은 이미 있었는데, 지난해 가보니 별도의 장소에 보관중인 것 같더라”며 “새 흉상 제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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