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벽에 달항아리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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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벽에 달항아리가 걸렸다”
  • 박소영 기자
  • 승인 2009.05.07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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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도예가의 경덕진에서 보낸 1년…생활자기의 새영역 구축해
저(低)부조 형태의 작품들, 3차원 도자기를 2차원으로 옮겨놓다

전시장 벽에 달 항아리가 걸렸다. 달빛을 닮은 백자와 생활 자기들은 이른바 현대미술의 설치작품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생활자기의 새로운 세계를 탐미한 주인공은 도예가 이승희 씨(52). 이번 <이승희 CLAYZEN>전시는 한국공예관 기획초대전으로 한국공예관 2층에서 4월 28일부터 5월 10일까지 열리고 있다.

젊은시절엔 화랑을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지역에서 10번이 넘는 개인전을 꾸준히 펼쳐온 근성있는 작가다. 그런데 이번 전시작품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줘 관심을 끌었다. ‘CLAYZEN’이라고 명명한 그의 작품들은 흙으로 빚어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다. 세면대, 밥상, 그릇, 저(低)부조의 설치작품 등 100여점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이승희 도예가의 <CLAYZEN>전이 한국공예관에서 오는 10일까지 열린다. /사진=육성준 기자
경덕진에서 찾은 정체성
이승희 씨는 지난 1년간 세계 최대 도자기마을인 중국 경덕진에 있었다. 이번 전시작품은 모두 경덕진에서 빚은 것들이다. 도자기를 하는 사람들의 로망이기도 한 경덕진에서 그는 어떠한 일들을 겪었을까.

“아침 6시에 일어나 밥을 지어먹고 8시까지 출근해 6시까지 꼬박 작품을 만들었죠. 처음에는 언어가 안 통해 작업장을 구하지 못해 3개월 동안 4평 허름한 아파트에서 혼자 작업했어요. 3개월 후 공방을 내고 조금이나마 소통을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혼자 작업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그곳에선 도자기를 만드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이었으니까요.”

사실 그는 딸을 유학 보내면서 2006년 무심갤러리에서의 전시를 끝으로 중국으로 떠났다. 마침 베이징 798지구 인근에 이종목·손부남 작가와 공동 작업실이 있는 터라 여행과 작업을 목적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 후 1년 뒤 여행 차 우연히 들른 경덕진의 매력에 꽂혀 그는 그곳에 곧바로 예술의 짐을 풀었다고 한다.

   
저부조 도자기판에 민화를 그리다
이 씨의 경덕진 생활에 대해 선문답이 이어졌다. “그동안 12가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고 치면, 경덕진에는 50가지 크레파스가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어떻게 저 색깔을 다 낼 수 있는 건지, 욕심이 나서 갔지만 이제는 굳이 해보지 않더라도 색을 다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어요. 작업하면서 스스로의 두려움과 원망에서 벗어났다고 하나. 대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문화적인 광활함에 주눅 들기도 했었는데, 어느덧 욕망에서 벗어나고 보니 도리어 제 정체성을 찾게 되더라고요.”어쩌면 그에게 크레파스는 도자의 다양한 기법과 문화였을 것이다.

‘이승희’이름으로 마지막 전시
경덕진은 130만 인구의 절반이상이 도자기 만드는 일에 종사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골목마다 길마다 공방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지만 이방인에게 쉽게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공방을 얻기 전 아파트에서 작업하면서 그는 혼자 밥 먹는 시간, 세수하는 시간이 가여워 자신을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투박한 식탁위에 정성스럽게 손수 빚은 밥상, 세숫대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러한 추억이 담긴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곳은 제 고향이예요. 고향에서는 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지 간에 고향 사람들은 그냥 저를‘이승희’로 바라봐주니까요. 버리고 싶은 작품도 있었지만 일부로 꺼냈어요.”그래서 이가 빠진 밥상도 전시장에 놓일 수 있었다는 것. 이 씨는 그의 일상이 담긴 작품을 관객들에게 친근하게 설명했다.

   
눈에 띄지 않았던 세면대도 이젠 작품이 된다.
“솔직히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작업에 매달린 적이 없었어요. 매일 매일 감옥에 갇혀서 도자기를 만드는 심경으로 반성하면서 작업했어요. 이제는 그러한 고된 작업이 익숙해졌고, 에너지로 가득찬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번 전시를 통해 덜어내고 싶어요. 제 그릇이 작기 때문에 더 많이 덜어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겠죠?”

그의 작업들은 경덕진 뿐만 아니라 베이징 798에 위치한 아트사이트 갤러리에서 소개돼 관심을 끌었다. 청주에서 오기 전 열린 베이징 전시를 보고 2군데의 외국화랑이 작품을 사갔을 뿐만 아니라 전시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3차원의 도자기를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긴 그의 작업은 어느 누가 재현할 수 없는 독특함이 빛났다. 특히 저부조 형태로 도자기를 빚어 벽에 건 아이디어는 신선해보였다. “도자기 작가라는 틀에 얽매여 있잖아요. 현대미술작가들이 도자를 테마로 작업을 많이 하는데, 여기에 일종의 도전장을 내밀고 싶었어요. 흙을 수십 년 만진 사람이 도자의 매력을 더 잘 아니까요. 도자의 참 매력을 현대미술의 기법을 통해 다시 알려주는 셈이죠.”

이는 그가 경덕진에서 작업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이번에 모필을 사용해 도자에 그림을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붓으로 드로잉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는 것. 우리나라의 민화부터 모더니즘을 극한으로 보여주는 설치물까지 도자를 통한 그의 생각은 자유로워보였다.

   
백자의 8가지 색을 보여주는 작품 ‘그 유약으로부터’
흙으로 빚은 현대미술
그러나 역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도자 그 자체의 매력일지 모른다. 백자의 8가지 색을 보여주는 작품 ‘그 유약으로부터’를 만든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백자의 유약 하나 하나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버릴 수가 없었어요.”그래서 역시 저부조 형태로 8가지 유약의 쓰임과 다름을 표현해냈다. 생활자기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지만 정작 생활자기의 쓰임에 대한 답변은 소박하다. “주인 맘대로 아닐까요.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거예요.”

이 씨는 5월 14일부터는 서울 UM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잡혀 있다. 개인전을 마친 후 그는 다시 경덕진으로 떠난다. “앞으로는 ‘이희’이름으로 활동하려고요. 그러니까 제 이름으로는 마지막 전시인 셈이죠. 외국 사람들이 발음이 어려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제 결단이기도 해요.‘이희’는 중국말로 ‘이씨’예요. 편하게 부를 수 있고 발음도 재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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