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청주역사를 밝혀낼 신비의 땅
흥덕사의 형(兄)같은 원흥사 터 밝혀내고 제대로 보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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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청주역사를 밝혀낼 신비의 땅
흥덕사의 형(兄)같은 원흥사 터 밝혀내고 제대로 보존해야
  • 충청리뷰
  • 승인 2003.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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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함께 하는 역사기행 (16) -원흥이마을

청주의 새로운 현장체험학습장 원흥이 마을. 지금 이 곳은 여기저기 벌건 속살을 드러낸 땅이 많습니다. 흥덕사 판 ‘직지’보다 72년 먼저 원흥사 판 ‘금강경’이 이 곳 어디에선가 목판 인쇄되었을 가능성 때문에 유적 시굴 조사한 현장인데요.

지난주에 이 지면에 소개했던 어린이 기자단도 그 시굴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원흥이 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안골’이었습니다. 원흥이방죽 바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지요. 지금 이 곳에는 파란 비닐이 덮여 있습니다. 시굴 조사 때, 절터 혹은 큰 집터가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석축대가 나왔기 때문에 발굴지로 지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린이 기자단은 지난 여름, 이 곳에서 시굴 조사를 하던 역사전문가를 만나 유적 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유적 조사의 삼 단계(지표조사, 시굴, 발굴), 지형에 따른 시대별 유적 분포 등의 설명 등이었지요(아래 용어 해설 난에 별도 처리). 사실 그런 이야기는 아이들의 국사 교과서에는 있지도 않은 내용일뿐더러, 시굴 현장 바로 눈앞에서 듣는 생생한 기회였기에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기만 했습니다. 

원흥이 마을 안골에서는 건물터말고도 옛 가마터와 탄화미(炭火米)도 발견되었는데요. 물론 유적 시굴 현장이 특별 보존 지역인 탓에 담당자의 안내가  없을 때는 이만치 멀찌감치 떨어져 볼 수밖에 없었는데도, 아이들의 상상력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이 곳 원흥이 옛 가마터에는 주변에 도자기 파편들이 추가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도기를 굽던 건 아닌 듯 싶고, 아마도 기와를 굽던 곳이 아니었을까, 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단박에 옛 원흥사의 기왓장을 굽던 곳이었거라는 추정도 했고요. 불에 탄 쌀이 나왔다는 시굴 장소에서는 고려 시대 몽고란 때, 아마 급히 쫓겨가느라 그랬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 추정에는 만화로 된 역사책에서 흔히 보았던 장면인 탓도 있겠지만, 사실 역사학적으로도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부쩍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던 아이들에겐 모든 게 궁금증 투성이였습니다. 원흥이 안골 옛 건물터에서 석축대를 살피던 아이들은, 도대체 이렇게 크고 많은 돌덩이들을 옛 사람들은 어디서 가져다 썼을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전문 용어로는 채석 흔적이라고 하는데요. 원흥이에는 구룡산 산자락 곳곳에 이런 채석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서 돌덩이를 떼어 냈던 흔적.

옛 사람들은 바위에 구멍을 낸 후, 물에 젖은 나무 조각을 끼워 놓습니다. 그 나무조각이 마르다, 젖다 하는 걸 반복하면서 점차로 바위를 잘라내는 건데요. 원흥이 마을 일국사 뒤편에는 옛 석공들이 방금 전까지도 돌을 채취했던 듯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안골마을 옆 계곡에도 있는데, 이곳에선 새끼 가재들의 움직임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원흥이 마을의 유적 시굴 현장에선 여러 가지 중요한 ‘옛 청주 역사의 열쇠’가 될만한 게 많습니다. 지표 조사 때만 해도, ‘이곳에는 선사 시대 이전의 역사 유적은 없는 곳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시굴 조사 때 ‘청동검’이 나와 지표조사 결과를 뒤집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옛날 사람들이 철을 제련하던 철 찌꺼기 흔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이곳이 금강경을 찍어낸 원흥사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라는 몇몇 실증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우리의 아이들은 나름대로 반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청주의 어디에 <원흥>이라는 마을 이름을 쓰는 곳이 있으며, 우리가 직접 찾아다녔던 탑골, 절골, 중말 등의 마을 이름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갗 하고요.

아이들의 발걸음은 계속 되었습니다. 원흥이에서 놀던 아이들은 이제 운천동 흥덕사 터를 찾아갑니다. 가서, 1980년대 운천동 택지 개발 중에 포크레인의 억센 발길에 찌그러진 ‘흥덕사 금구’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찹니다. 또한 밀랍인형 몇 개를 나열해 놓은 고인쇄박물관이나 집(금당) 한 채 달랑 엉성하게 복원해 놓은 흥덕사 터 앞에서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습니다.

세계 고인쇄 문화의 발상지라는 흥덕사 터에서,‘직지’를 주조할 당시의 고려시대 청주가 머릿속에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일 겁니다. 이는 결코 아이들의 역사적 안목의 깊고 얕음이나 역사적 상상력의 부재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여유가 없어서입니다. 흥덕사터를 통해 상상력이 꿈틀댈 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없음이요, 옛 고려 시대 때의 흥덕사를 짐작할 만한 유적 복원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아이들은 주먹을 굳게 쥐고 다짐을 합니다. 원흥사는 흥덕사의 형(兄)같은 곳이니, 이번만큼은 운천동 택지개발 당시 흥덕사 터에서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원흥이 마을을 제대로 발굴, 보전해야 한다, 라고요.

만약 아이들의 이런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면 그야말로 원흥이는, 연중 교육전문가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으로 유명한 ‘레지오 에밀리아’ 못지 않게, ‘역사 생태 보전 운동의 새로운 견학지’로 떠오를 듯도 한데요. 여러 어른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유적 발굴의 세 단계>
1단계-지표조사
지표조사란, 땅을 파지 않고 눈으로 보이는 유물들만 조사하는 것이다. 산남동 원흥이 마을은 개발 계획이 발표된 1994년에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2단계-시굴
시굴이란 지표조사 때, 뭔가 유적이 나올 곳 같아 보이는 곳을 골라 좀더 자세히 조사해 보는 것이다. 시굴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땅을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그어 놓고, 조금씩 땅을 파낸다. 이 때 땅을 파는 깊이는 50cm를 넘지 않는다. 땅을 가로 세로로 교차해 가면서 파다가 돌 같은 게 걸리거나 집터, 무덤 같은 게 나오면 발굴 요청을 한다
 3단계-발굴
시굴 후에 확실한 유구(건물, 무덤의 흔적)가 발견되면, 일단 현장을 덮어놓는다. 그리고 시굴이 끝나면 “지도위원회”에 발굴 필요성을 보고한다. 이에 “지도위원회”에서 발굴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 후에, 발굴이 결정되면 땅을 완전히 파본다.

■ 유적, 유물은 어디에서 많이 나올까?
1. 구석기시대 유물-산 가까운 곳에 많이 나온다. 옛 원시인들은 동굴 생활을 했기 때문.
 2. 신석기시대 유물-해변, 강 주변에서 많이 나온다. 물고기 등 수렵 생활을 했기 때문.
 3. 청동기, 철기, 삼국 시대의 유물-마을이 넓게 자리잡은 곳. 집단으로 농사를 지으며 부족과 국가가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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