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자씨, DJ 향한 ‘亡父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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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자씨, DJ 향한 ‘亡父歌’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8.26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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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딸처럼 한 방에서 6년을 살았습니다”
잇따른 낙선, 사별과 재혼 등 곁에서 지켜봐

“왜 그렇게 빨리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아까운 분이신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을 이틀 앞둔 21일 청주 상당공원 분향소에서 만난 정순자(70·청주)씨는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나 갔어도 직접 뵙지 못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어째 그렇게 소식도 없고, 왜 이제야 왔냐’고 나무라시더라고요. 그래도 입관식 미사에는 억지로 끼어들어가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과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정씨가 이처럼 육친적인 애정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딸처럼 한 집에서 살았던 6년 동안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정씨가 김 전 대통령 일가와 함께 했던 6년은 국회의원 후보등록 무효와 낙선, 첫 부인과 사별, 민의원 첫 당선, 이희호 여사와의 재혼 등 김 전 대통령의 가족사에 있어서 격변의 풍랑이 일던 시기였다. 그 뒤에도 정씨는 김 전 대통령의 집을 친정집처럼 드나들며 DJ를 ‘두 번째 아버지’로 여기고 살아왔다. <충청리뷰 2005년 5월14일·379호 보도>

▲ 김대중 전 대통령을 친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았던 정순자씨가 김 전 대통령 서거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김 전 대통령의 신원보증으로 청주연초제조창에 취업을 했고, 결혼과 함께 청주에 눌러앉았다.

정씨에게 김 전 대통령은 이웃집 아저씨였다.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이 상경해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 자리를 잡았을 당시 두 집안이 이웃해 살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에 작고한 정씨의 아버지 정대언씨 역시 호남 출신인데다 김 전 대통령과 나이마저 같아 두 사람은 이웃사촌 이상으로 가까이 지냈다. 1958년 당시 19살이던 정씨가 김 전 대통령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병치레를 하는 가족이 많았던 DJ 일가에서 병 수발을 도와달라고 요청해온데 따른 것이었다.

정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홍일(장남)이 어머니(고 차용애 여사)가 ‘강원도 인제로 선거를 하러가야 하는데, 집에 아픈 사람이 많으니 한 달 동안 환자나 돌봐 달라’고 부탁해 들어갔던 것인데 6년을 눌러 살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인제로 선거구를 옮긴 뒤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자유당 후보의 방해로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1959년 보궐선거, 그리고 5대 총선에서도 패배의 잔을 마셨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고 전 재산을 날렸다.

원내에 진출한 것은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틀 뒤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의원직을 박탈당해야 했다. 평생의 동지인 이희호 여사와 결혼한 것은 1962년 5월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6대 총선(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정씨가 DJ일가와 함께했던 시간은 이 6년이었다.

정씨가 취업과 결혼 등을 이유로 김 전 대통령의 집을 떠난 뒤에는 정씨의 여동생인 이례(67)씨가 정씨의 뒤를 이었다. 이례씨도 김 전 대통령의 막내 홍걸씨를 업어 키우는 등 4년을 가족처럼 지냈으니 두 자매가 합쳐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DJ 일가와 함께 한 것이다. 

다시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정씨가 김 전 대통령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허위허위 올라간 것은 8월10일쯤이었다. 경황이 없었던 만큼 정씨는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당시 상황에 대해 “9층에 가니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고, 20층으로 올라가서도 가족접견이 되지 않아 실랑이를 벌이는데 마침 홍업이를 만났다. 눈물부터 쏟아지는데 ‘누나가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하는데 이렇게 울어서야 되겠냐’고 나무라더라. 이희호 여사를 뵈니 며느리들과 함께 순대, 떡볶이를 드시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급한 마음에 빈손으로 간 것이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며칠 뒤 이 여사가 좋아하는 ‘찰떡’을 찬합 3개에 담아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날은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병문안을 온 8월12일이었다.

정씨는 “지난번 문안 때 ‘지금도 찰떡을 좋아하시냐’고 여쭈니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마음에 남아 부랴부랴 찰떡을 준비해 다시 찾아갔다. 그릇을 비워주신다는 것을 천천히 드시라고 만류하니 ‘그럼 또 언제 오려고? 일어나시거든 와라’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눈에 선하다. 이 여사께서도 이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때 덧버선을 뜨고 계셨던 것 아니겠냐”며 또 다시 눈물을 훔쳤다.       

정씨는 8월20일 열린 입관식 미사에도 참여했다. 가족과 측근 정치인 등 약 30명에게만 허용된 자리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관이 닫히기 전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정씨는 “너무 편안하게 계셨다. 사모님이 애통해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시는데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정씨는 또 “퇴임하신 뒤 동교동에 가서 뵌 것이 마지막이다. 그간 찾아봬야 했는데 너무 후회스럽다”며 울먹였다.      

그 분은 높고 낮음이 없는 사람
“몸 약한 나를 위해 여름에도 불을 땠다”

정순자씨가 기억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마디로 말해 ‘높고 낮음이 없는 사람’이다. 심장병으로 20대 중반에 요절한 김 전 대통령의 여동생 부미자(일본식 이름)씨를 간병하는 것이 정씨의 몫이었지만 정씨 역시 약골이어서 오히려 딸 대접, 손녀 대접을 받는 상황이었다. 

▲ 정씨의 여동생인 이례씨도 정씨에 이어 4년 간 김 전 대통령 일가와 한집살림을 했다. 김 전 대통령 부부와 장남 홍일, 3남 홍걸씨의 가족사진.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정순자씨의 여동생 정이례씨.

정씨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생활한 6년 동안 마포구 대흥동에서 시작해 이대 옆 신촌시장 부근, 서대문구 대현동 등 일일이 장소와 순서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무려 7식구가 방 2,3칸에서 생활하다보니 정씨는 김 전 대통령과 한방을 쓰기도 했다. 

정씨는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를 아랫목에 가로로 재우고 나머지 식구들이 윗목에서 세로로 잠을 잤다”며 자신을 한 식구처럼 배려해줬던 그 당시를 회상했다. 가끔은 여름에도 불을 땠는데, 김 전 대통령은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으며 “네 녀석 때문에 내가 여름에도 뜸질을 한다”며 오히려 너털웃음을 웃었다는 것이 정씨의 회고담이다.

정씨가 DJ 일가를 떠나게 된 것은 1965년 청주에 있는 연초제조창에 취업이 되면서부터다. “구멍가게를 내주든지 쓸 만한 직장을 잡아 공을 갚을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누누이 말하던 김 전 대통령을 신원보증인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정씨는 “청주에서 결혼해서 살면서 TV에서 얼굴만 봐도 울었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김 전 대통령을 근거 없이 비난할 때는 화장실에 숨어 가슴을 쥐어뜯으며 분을 삭였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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