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화합·도덕적 자각의 시대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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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화합·도덕적 자각의 시대 연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9.09.3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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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대도(金剛大道), 남천포덕 100주년 역사적 전기 맞아
이법산(李法山) 대종법사, ‘태극적 개화시대’ 적극적 포교 선언

   
▲ 이법산(李法山) 대종법사
근대 한국의 신종교인 금강대도는 1906년 토암(土菴) 이승여(李承如 1874~1934)가 종교적 체험을 통해 대도를 자각하고 창도했다. 시기적으로 증산교(1901년) 천도교(1905년 동학에서 개칭) 단군교(1909년)의 태동 시기와 비슷하다. 금강대도의 1대 도주인 이승여는 목은 이색의 18세손으로 외금강 유역인 강원도 통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이르러 조선시대 500년의 성리학적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있는 사회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인륜과 도덕성의 타락을 우려하면서 儒·佛·仙 기성종교의 중생 구제력에 대한 강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여 년간의 구도, 수련 끝에 창세구제의 사명감을 갖고 대도를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침내 1910년, 강원도의 활동범위에서 벗어나 신흥종교의 성지였던 충남 계룡산 신도안 백암동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된다. 금강대도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시발점이 된 이 사건을 남천포덕(南遷布德)으로 명명하고 내년도에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중흥기를 맞은 금강대도는 1923년 현재의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삼종대성전(三宗大聖殿)’을 건립하고 경성을 비롯한 각 지방에 지부를 설립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당시 금강대도 신도수가 1만3천명에 달해 신종교 가운데 천도교, 보천교에 이어 3번째의 교세를 나타냈다.

   
▲ 금강대도의 신앙대상인 대도덕성사건곤부모의 성적비(聖蹟碑)가 안치된 연화대(蓮華臺)
구한말 儒·佛·仙 한계 극복한 신종교
금강대도 교리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다른 신종교들이 ‘후천개벽’을 주장하며 천지개벽을 내세우는데 반해 인간의 도덕성이 밝아지는 개화(開化)로 본다는 점이다. 결국 급박한 변혁보다는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을 추구하며 오중시대(午中時代)를 강조한다. 오중시대란 하루중에도 정오(正午)에는 태양이 하늘의 가장 중앙에 올라 만물을 비추기 때문에 그림자가 지지 않고, 우주적으로 가장 광명하고 모든 것이 화합하는 시대이며, 특히 음양의 평등은 물론, 모든 인간이 평등한 시대라고 강조한다.

유, 불, 선 삼종일합(三宗一合)의 진리를 주장하여 인간의 도리와 자비와 청정을 근간으로 하는 “실행십조” “십계율”로서 가르침을 집약하고 있다.

대도의 초석을 다져온 이승여는 1934년에 열반하고 장남인 청학(靑鶴) 이성직(李成稙)이 제2대 도주로 도통을 승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제의 식민지 종교통합 정책으로 끊임없는 회유와 탄압을 받게 된다. 일제는 1937년에 간도이민 정책에 따라 한국인 1만2천명을 반강제로 내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충남에서는 배일(背日)단체로 지목된 금강대도 도인들을 상대로 간도이주의 회유와 협박이 빗발쳤다.

   
▲ 금강대도 총본원의 정문이며 유불선(儒佛仙) 삼종을 합하여 개화(開化)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삼종개화문(三宗開化門)
당시 금강대도 김도현 종심원장은 그때 상황에 대해 “군과 면직원이 번갈아 찾아와서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아무도 도장 찍은 사람이 없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분산시키고 쫓아내어 결국 우리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만 그건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는 샘물과 같아서 당신들이 아무리 물을 퍼내도 퍼낸 만큼 샘물은 고일 것’이라며 물리쳤다”고 한다.

항일단체로 몰려 집중탄압 받아
1934년에 대전 도청 앞에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자 비밀리에 준비하여 진행하였으나 강제해산으로 무산되었고, 백의민족임을 주장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계속하니 이를 두려워한 일제는 일본의 불교와 통합할 것을 강요하며 종교합병을 회유하다가, 이를 거부하자 급기야는 금강대도를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총칼을 앞세워 난동을 일으키게 된다.

   
▲ 2010년 남천포덕 100주년을 맞은 금강대도 총본원은 지난 7월 주민들을 무료초대해 ‘제1회 옥화촌 연꽃음악회’를 개최했다.
1941년 일제 헌병과 경찰 500여명이 한밤중에 금천리 총본원에 난입해 도주 이하 50여명을 검거 투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신사사변(辛巳事變)으로 명명됐고 당시 옥중 순도자가 10여명에 달하고 성전과 부속건물이 모두 파괴당하여 초토화되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헐어낸 건물의 목재는 당시 충남 공주 갑부이자 매국노였던 김갑순이 강제로 모두 가져가 대전 유성호텔 신축공사에 쓰기도 했다. 당시 뜯어낸 건물부재가 얼마나 크고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금강대도는 광복 후 성전과 총본원 건물을 다시 재건하였고 금강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청소년 교육에 주력했다. 또한 제1대도주가 구술친저한 대성경(大聖經) 등 제반 경전을 간행하고 ‘성재(誠齋)’라고 하는 정기적인 수련과정을 두어 도덕 강론과 심성수련에 진력해 도인 수가 다시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중흥의 발판을 만든 2대 도주 청학 이성직은 일제하 모진 옥살이등으로 인해 1957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열반했다.

은둔적 자세 벗고 태극적 개화시대로
3대 도주 월란(月鸞) 이일규(李一珪)는 1962년 전도인의 추대로 총관장에 취임했다.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한 월란은 핵심 교리인 충·효·성경을 ‘의성(義誠)’이라 표방하고 신앙과 수련을 독려했다. 금강대도도사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충청권에 교화조직을 대폭 확대했다. 또한 의성장학회를 설립해 육영사업을 펼치는 한편 67년 서울회관을 건립했다. 아울러 대전에 운수회사를 설립해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주력했다. 73년 금강개도 1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올리고 강법단, 오만등대, 도성덕립문 등 성전 시설을 완공해 금천리 일대를 수도도량으로 성역화했다.

1986년 도주 직속으로 ‘종법위원회’를 조직하고 장남인 법산(法山) 이경구(李敬求)를 총회장에 임명했다. 이 총회장은 청년도인 육성단체인 ‘백운도우회’와 산하 ‘종리연구원’을 조직해 ‘오만등대’ 2집을 발간하고 전국 연구원, 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적극적인 포덕의 기틀을 삼았다. 91년 ‘대도발전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그동안 무극적으로 은도해 왔던 금강대도의 체제를 ‘태극적 개화시대’로 전환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준비사업에 착수했다.

   
▲ 일제의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한 도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성경대(聖敬臺:의성탑)
한편 도주 월란은 2004년 6월 열반했고 법산 이경구 대종법사가 4대 도주의 중책을 맡고 있다. 법산 대종법사는 예악정비사업, 교화조직 정비사업, 종리학 수립을 위한 정기적인 학술대회개최, 대성전 및 문화회관 건립사업 등 내부정비에 힘써왔다. 또한 지난 8월에는 금천리 총본원에서 ‘제1회 옥화촌 연꽃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대도를 외부에 알리기 위한 지역밀착화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100여년 역사, 100여개 도장에 70여만 도인 활동

대외적으로는 금강대도로 통칭하여 소개하지만 내적으로는 ‘금강대도’와 ‘연화대도(蓮華大道)’로 양립해 있다. 이는 음양평등의 사상적 기반을 나타내는 것으로 도인들은 3대에 걸친 금강대도주와 마찬가지로 자암, 보단, 향련의 3대 연화대도주도 숭배하고 있다. 연기군 금천리에는 ‘금강대도총본원’과 ‘연화대도총본원’을 함께 두고 있으며 전국 각 지방에 본원, 분원, 회관을 100여개 설치하고 있다. 현재 교세는 도인수가 70여만 명으로 자체 집계됐고 향후 양로원·장학회 운영을 비롯해 도직자 양성을 위한 대학원 대학 설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금강대도는 백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분파현상을 겪지 않고 하나의 종단으로 유지해 온 점이 다른 종단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는 도주를 절대 유일자로 신봉하면서 도통의 계승을 혈통적으로 이어온 점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폭넓은 교세에도 불구하고 은둔적인 수도를 강조해 외부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금강도인과 연화도인은 일체의 육식을 금하고 있으며 금강대도주와 연화대도주를 모신 삼종대성전을 가장 성스런 곳으로 모시고 있다. 또한 도주가 집무하는 종법원과 도무 수행기구로 총본원 산하에 종무원, 교화원, 종심원, 도무연수원, 문화원 등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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