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회장에 대한 두 가지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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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회장에 대한 두 가지 시각
  • 오옥균 기자
  • 승인 2009.11.18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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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사업적인 감각·통찰력 두루 갖췄다
부정-남다른 지역사랑 기대했지만 ‘실망’

   
▲ 이준용 회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사업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업가란 평가와 지역에서 성공을 이룬 향토기업인으로서 지역 내 역할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언론에 노출을 꺼려하는 이 회장의 성향 때문에 도내 어느 언론사도 이 회장의 인물사진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 없다.
이준용 신라개발 회장에 대한 지역 내 평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업가 이준용에 대한 시각이다.

충주 출신으로 20대에 사업에 뛰어든 이 회장은 청주로 사업본거지를 옮겨와 청주대 앞 청도극장과 상당공원 사거리 신라예식장을 통해 큰돈을 벌며 수완 좋은 사업가로 평가받았다. 건설업에 뛰어든 이후에도 이 회장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도내 주택건설업의 역사는 70년대 후반 평화건설에서 시작된다. 이후 1981년 설립된 신라개발을 비롯해 두진 덕일 태암 삼일 삼진 경희 삼정 등 1.5세대가 등장하면서 도내 주택건설사업은 첫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건설부문 향토기업들은 지역경제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성장세를 이어가던 도내 건설업체들은 외환위기라는 벽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급성장 속에 내실을 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로 도내 건설업체는 대부분 파산했고, 살아남은 곳은 신라개발과 두진 정도였다.

과유불급의 철학
신라개발이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리한 경영을 하지 않은 덕분이다. 앞서 말했듯 정책자금 외 금융권 대출을 받지 않고 사업을 진행했다. “500세대 가량의 아파트는 빚을 내지 않고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자본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아파트가 완공되고 분양이 이뤄져 투자한 자금이 회수된 후에야 또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예상보다 분양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기회비용이 줄어들 뿐 사업 손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회장은 투자 등 적재적소에 쉽게 자본을 투입할 수 있도록 신라개발 사업자 또한 법인이 아닌 개인을 택했다. 신라개발의 자산이 곧 그의 재산이었다. 한 관계자는 “1992년 평택·중동 신도시에 아파트를 지을 때 1100세대·1400세대 아파트를 짓는 업체가 개인사업자라는 사실에 그 지역 건설사들도 놀랐다”고 설명했다.

자본력을 갖춘 이 회장이 당시 욕심을 부렸다면 다른 건설업체보다도 빠르게 성장했을 것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무리한 경영을 하지 않았고 결국 주변 업체들이 쓰러져 갈 때도 신라개발은 성장세만 늦춰졌을 뿐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또한 느린 걸음으로도 신라개발은 80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건설한 몇 안 되는 도내 업체로 성장했다.

한 지역 경제인은 그를 두고 “손해보는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또한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망설이지 않고 접는다”며 “사업적인 감각과 통찰력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했다.

구속 당시 도민들 적극 지지
지역에서 아쉬워하는 부분은 사업가 이준용이 아닌 사람 이준용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충북사람 이준용이다. 이 회장은 1995년을 마지막으로 공동주택사업을 중단했다. 또한 1998년 서울 목화예식장을 인수하면서 서울로 사업본거지를 옮긴 이 회장은 제주도 세화·송당 온천지구 구획정리사업에 참여하는 등 타 도시로 눈길을 돌렸다.

단지 이 회장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기반을 일군 다수의 사업가들이 지역을 떠났다. 지역 사업가들에 대해 뜨거운 눈초리와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향토기업으로서 일정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 지역인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이 회장의 구속 당시 철저히 이 회장 편을 든 지역인사들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

2005년 제주도 세화·송당 온천지구 시공사로 선정돼 사업을 진행하던 이 회장은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근민 전 제주지사와 전 북제주군수에게 각각 3억원과 7억원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같은 해 11월 구속됐다. 구속될 당시 지역경제계를 비롯한 지역민들은 한 식구인양 이 회장이 무죄판결을 받길 고대했다.

구명운동도 줄을 이었다. 청주상공회의소는 회장단회의를 통해 구명운동을 정식 결의한 후 회원들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를 제주지검에 제출했고, 대한건설협회 충북도회도 탄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이태호 회장은 “충북을 대표했던 기업인이었던 만큼 조속히 사회인으로 복귀해 선처해 달라는 의미”라고 탄원서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준용 회장이 거주지도 서울로 옮겨가고 사업기반도 사실상 수도권으로 옮겨간 상황이었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 회장을 ‘충북을 대표하는 기업인’, ‘충북 출신’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언론보도도 우호적이었다. 혐의가 석연치 않다며 반대된 주장을 펴기도 했고, 이와 같은 언론보도를 통해 지역 내 여론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시 사건은 지난 중부4군 보궐선거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제주지검장을 지냈던 경대수 후보에 대한 원망이 표심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 회장의 관심과 관계없이 이 회장에 대한 도민들의 관심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무죄판결을 받고 나온 이후에도 이 회장은 지역을 외면했고, 지역발전을 위한 사회환원에도 냉담했다는 평가다.

베일에 가린 이준용 회장
취재를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전화인터뷰도 성사되지 않았다. 지역 언론에 노출을 지극히도 꺼리는 그의 성향은 도내 언론사에 이 회장에 대한 자료사진 하나 없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회장의 측근은 “워낙 언론에 거론되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고 거절 이유를 설명했다.

민간개발로 진행되고 있는 방서도시개발사업은 이 회장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체 사업면적의 1/4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 회장이 개발사업을 통해 도내 사업을 재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사건이 마무리 된 터라 지역경제계는 이 회장의 복귀를 내심 기대했다.

실제로 신라개발은 조합의 이사로 참여하는 등 사업 초기 주도적인 역할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결국 신라개발은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토지만 매각했다. 신라개발의 사업포기가 개발사업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지금까지도 방서도시개발사업의 진행이 지지부진한 것이 신라개발의 사업포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신라개발 측은 “토착기업이 개발사업의 일선에 나서면 오히려 사업진행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판단”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바람만 잡고 투자이익만 챙긴 것 아니냐’는 부정적 시각도 팽배하다.

지역경제계가 이 회장의 역할에 대해 기대를 했던 만큼 최근 그의 행보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회장의 한 측근은 “내년 2, 3월이면 이 회장이 사업의 전면에 나설 것”이라며 복귀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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