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에 이런 서원 있는 것 몰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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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에 이런 서원 있는 것 몰랐죠?”
  • 충청리뷰
  • 승인 2003.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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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기관 모습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체험

자녀와 함께하는 역사기행 (27)-신항서원

얼마 전, 대입 수능성적이 발표되었다. 시험을 본 학생이나 이를 지켜본 가족들에겐 희비가 교차되는 순간이다. 올해도 각 대학의 모집창구는 마지막까지 치열한 눈치경쟁과 줄서기의 진풍경을 어김없이 보여줄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온통 들썩인다 싶을 만큼 해마다 되풀이되는 대입제도는 많은 이들로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다. 백년대계는 고사하고 희망이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교육의 위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것인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교육이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의 교육현장 신항서원을 둘러보며, 대안은 없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신항서원으로 떠나기에 앞서 조선의 교육제도를 잠시 훑어보자. 조선의 교육제도는 크게 국립학교라 할 수 있는 향교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는 서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 초 향교 중심의 교육이던 것이, 1542년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창건하면서 향교가 쇠퇴하고 서원이 성행한다.

그 후 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현판과 노비, 서적과 세금감면 등 특혜를 받는 사액서원이 생기면서, 전국에 서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교육기능보다 개인의 치부와 패권의 온상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1871년 흥선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라는 된서리를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서원이 폐지되었고, 신항서원 역시 예외일수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 면면히 이어온 신항서원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우선 신항서원이 어디에 있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은 동부외곽도로를 타고 김수녕양궁장 갈림길에서 이정골로 들어서면 된다. 버스종점에서 오르막길을 조금만 더 오르면 신항서원이 보인다. 옛 모습은 아니지만 아담하게 복구되어 있다.

신항서원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외삼문이다. 이 외삼문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현판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항서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신항서원 경자4월 일월성 김견구 서(莘巷書院 庚子4月 日月城 金堅九 書)’.

즉, 경자4월은 조선의 현종 원년이므로  1660년에 사액을 받아 유정서원이었던 이곳을 신항서원으로 바꾸었음을 알 게 해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서원 마당 안에 있는 비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항서원묘종비에는 서원에 모신 성현들과 유교의 사상, 그리고 유정서원이 신항서원으로 바뀐 이유와 신항서원이란 이름의 유래를 적어 놓았다. 이 비석의 글을 송시열이 지었다고 한다.

이 묘정비를 지나면 비로소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 보인다. 서원의 건물 중 가장 넓고 규모가 크다는 강당이지만 요즘의 잣대로 본다면야 교실 한 칸 이나 될까. 지금의  학교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교실이다. 서원도 규모가 작으면 작은 대로 학생수를 엄격히 제한해 받았다. 또한 입학한 학생들은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단계별 학습과 소규모 교육이 이뤄졌다.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어 큰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학생수는 많고, 친구가 경쟁 상대고, 피아노다 그림이다 영어다 그저 쫓아가기 급급한 오늘의 교육여건에서 보면 조선의 교육은 부럽기만 하다.

잠시 김홍도가 그린 서당의 풍속도를 보자. 훈장선생님과 학생이 무릎을 맞대고 앉은 교실, 혼난 친구를 보며 키득거리는 개구쟁이들, 그 뒤로 주름 가득한 훈장님의 안쓰러운 표정. 이 한 장의 그림은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학교가 단지 지식의 전달만을 위하고 대형화되어 가고 있는 요즘, 이 한 장의 그림만으로도 학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가 될 듯싶다. 

강당 옆으로 구현사가 보인다. 이곳은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아홉 분의 위패를 모셔 놓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향교나 서원에서는 교육기능뿐만 아니라 제사기능을 담당했다.
신항서원의 건물배치는 무척 단순하다. 외삼문과 비각, 강당, 구현사로 되어 다른 서원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대부분의 서원 건물 배치를 보면 휴간공간인 루와 원생들의 기숙사인 내실과 도서관인 장판고, 교실인 강당, 선생님들의 사무실, 제사를 지내는 용기보관소인 제기고 그리고 사당이 맨 위에 있다. 따라서 신항서원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축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항서원을 둘러보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도지사 관사 근처의 향교를 방문해 서원과 향교라는 조선의 교육현장을 비교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항서원을 나와 다시 외삼문에 서면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잎을 다 떨어진 빈 가지엔 겨울을 나고 있는 어린눈이 보인다.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새싹을 틔울 수 있는 어린 생명들이 봄을 기다리듯 우리의 교육제도 또한 봄의 희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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