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짝 스타, 영원히 따라다니는 꼬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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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짝 스타, 영원히 따라다니는 꼬리표”
  • 박소영 기자
  • 승인 2010.11.2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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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년의 소원 풀어준 ‘신춘문예 당선기’
신춘문예의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에게 수상이력은 ‘행복한 꼬리표’다. 때로는 꼬리표가 부담스럽다고 고백하지만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사치스러운 변명으로 들린다. 신춘문예 당선은 이들의 삶에 ‘무엇’을 남겼을까. 연규상 열린기획 대표(2010년 경향신문 소설부문), 이종수 시인(98년 조선일보 시 부문), 김선호 청주시문화관광과장(96년 조선일보 시조 부문)등 당선자들이 들려주는 신춘문예의 생생한 속살을 엿보았다.

“자본주의 삶에서 꿈을 다시 기억하고 싶었다”
연규상 열린기획 대표

   
▲ 연규상 대표
“대학 졸업 후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문학이 밥을 먹여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렇게 20여년 가까이 소설도 안 읽고 살았다.” 연규상 씨(46)는 지난해 11월 중순 우연히 경향신문 공고를 봤다. 불현 듯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권의 철학책을 읽고, 당시 미디어법 통과를 두고 뒤숭숭했던 차에 이를 소재로 한 생애 첫 소설 ‘개가 돌아오는 저녁’을 완성한다.

‘개가 돌아오는 저녁’은 2010년 경향신문 소설부문 당선자에 이름을 당당히 올린다. 전시연출 전문기획사 열린기획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늦은 밤 야근을 핑계 삼아 컴퓨터 앞에서 글을 써내려갔다. “당선 생각은 정말 안했고, 혹시 최종 몇 편에 들면 심사평이 한 줄 이라도 실리지 않을 까 기대했어요. 그러면 한 줄을 가르침 삼아 소설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했죠. 막상 당선 되니까 굉장히 겁도 났고 난처하기도 하고….”

신춘문예 당선 이후 전국의 문예지로부터 원고요청이 쏟아졌다. “신춘문예 효과가 딱 1년이라고 하더라고요. 습작이 있으면 모를까 다시 써야 하니까 부담도 되고, 천천히 가려고 해요.”

충북대 영문학과 84학번인 연 씨는 대학교 때 공모전을 통해 용돈벌이를 짭짤히 했다. 그러나 작품을 쓸 계기는 없었다.

“신춘문예 당선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랐다는 동기부여를 줬어요. 소설 장르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경험과 경륜을 필요로 하죠. 앞으로도 내 세대가 익숙한 글쓰기로 내가 포착한 이야기를 하려고해요.” 지난해 경향신문의 경우 응모숫자가 1000편을 넘겼다. 먹고 살기 힘들수록 응모편수는 많아진다고.

“신춘문예가 삶에 남긴 건 아직까지 없어요. 자본주의 삶은 관성으로 오늘도 내일도 반복될 뿐이죠. 언젠가 전환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라고 믿어요. 그것이 제겐 문학이지 않을까요?”

“글쓰기도 상품이 된 시대가 안타깝죠”
이종수 참도깨비 도서관장

   
▲ 이종수 시인

서울에서 출판사를 다니다가 내려와 33살에 결혼을 했다. 98년 그해 겨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장닭공화국’으로 등단했다. 신춘문예 얘기를 꺼내니 시인 이종수 씨(45)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공중으로 5m를 뛸 듯이 기뻤어요. 문학청년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명함이었으니까요.”

등단한지 십년이 지났어도 신춘문예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는 율량동 삼정아파트(자택)에서 참도깨비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하며 엽서시 동인 대표 등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1년간 반짝 빛나죠. 인맥과 문학적 성과물이 없으면 쉽게 사라져요. 당시 청주대에서 당선자가 나왔다고 해서 반응이 엄청났어요. 전혀 인맥도 없는데다 지역에 사는 작가지망생이 당선된 것 자체가 이슈였으니까요.”그는 ‘자작나무 눈처럼’(2002년 실천문학사)과 육아서적 ‘요놈이 커서 무엇이 될꼬’(2004년)를 펴냈다. 도서관에서 한길, 한울 두 아들을 키우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그려냈다.

“신춘문예는 작가들에겐 하나의 스펙처럼 통하죠. 신춘병이라고 해서 심사 결과보고 안 되면 가슴앓이하는 청춘들이 예전에도 참 많았어요.”

그러면서 그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치열하지 않다고 고백한다. “어린아이 때부터 글쓰기는 좋은 대학을 가기위한 학습처럼 여겨져서 정답 안이 따로 만들어지죠. 다른 사람의 삶을 공유하고, 때로는 대변하는 문학의 본질이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라요.”

그는 동화작가가 되기 위해 공부중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는 이 씨는 느리지만 천천히 다음 시집을 엮고 있다.

“뼛속까지 스민 문학의 꿈 이뤘죠”
김선호 청주시문화관광과장

   
▲ 김선호 과장
김선호 청주시문화관광과장(53)은 초등학교 때부터 문예반활동을 했다. 선생님이 의미없이 ‘시조’라고 지정해줬던 것이 운명처럼 ‘시조시인’이 됐다.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가는 것도 미뤘다. 그의 말을 빌자면 ‘젊었을 때 놀다가 못 갔다’는 것.

그러나 한눈에 봐도 반듯한 문학소년 이미지가 풍기는 그가 소위 놀았다는 얘기는 어색하게만 들린다. “당시 글 쓰는 사람들에겐 리얼리티 삶을 체험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고, 그러다가 시기를 놓쳐 서른살에 입학했죠.”

군대를 전역한 뒤 26살에 공무원이 된 그는 96년 충북도 자치행정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일보에 ‘12월의 일기’로 시조부문에 당선됐다. 당시 주병덕 지사가 5대륙을 탐험하고 온 허영호 등반가와 함께 집무실로 불러 격려할 정도로 대단한 이슈였다. 특별승진 얘기까지 나왔지만 고사했다고.

그 후 ‘창공에 걸린 춤사위’‘차마 그 붉은 입술로도’‘공생시대’등 세권의 시집을 펴낸 그는 공무원 문학동호회인 행우문학회, 충북시조문학회, 나래시조 등에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글쓰기 욕망은 여전히 꿈틀거린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때부터 키워온 작가의 꿈에 대한 확신을 준 것은 5수 끝에 꼽힌 신춘문예 등단이었다. “시조는 고리타분하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아 안타깝죠. 음률과 스토리텔링 등 현대시보다 매력적인 부분이 많아요.”

공무원이면서 시인인 그는 정형화된 공문서나 상장 등을 ‘시조’형태로 바꾸어놓기도 했다. 또 명함에 소위 ‘삼행시’짓기를 유행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장독 묵은지, 깊은 그 맛 아시나요/ 선술집 탁배기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호접란 은은한 향도 한껏 뿜어 올리는. 명함에 새겨진 ‘김선호’이름을 갖고 만든 삼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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