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긴 원칙과 고집 여전히 살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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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원칙과 고집 여전히 살아 이어집니다
  • 김진오 기자
  • 승인 2010.12.0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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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빈민에서 통일까지 이 시대 마지막 비타협 운동가
별세 후 교회는 작아졌지만 고인의 흔적은 더욱 짙어져

   
▲ 故 정진동 목사.
故 정진동 목사 3주기

현대사의 가장 암울했던 70~80년대를 오로지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저항의 길을 걷다 간 故 정진동 목사의 3주기를 맞았다.

평범한 신앙인으로 살았다면 고난과 고초를 겪지 않았어도 될 것을 고인은 그의 눈에 비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72년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목사로 취임해 35년간 노동자와 빈민, 통일운동에 몸 바쳤다. 그의 교회는 군사독재정권에 억압받고 짓눌린 민초들의 안식처였고 유신을 거쳐 80년대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와 폭압의 대상이 돼야 했다.

그는 시민운동이 활성화 된 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원칙과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통령을 비롯해 위로부터 몇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밑으로부터 변하고 민주화가 돼야 한다는 게 그가 하나님 다음으로 믿던 신앙인의 양심이었다.
그가 민중속으로 몸을 던진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정권으로부터의 탄압은 각오했지만 장남을 의문사로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노동과 빈민운동을 비롯해 정춘수 동상 철거, 청주대 재단비리 의혹, 산남동 택지개발지구 보상민원 등 800여건이 넘는 현안 해결에 앞장섰고 도시산업선교회는 각종 농성과 시국강연회 등 활동의 전진기지로 이용됐다. 그러는 동안 고인도 30여차례나 연행되는 등 수차례 옥고를 치렀고 소속됐던 교단에서도 제명돼 재야운동가와 더불어 재야신앙인이 돼야 했다. 이렇게 한평생 힘없는 민중의 편에 서서 권력에 맞서온 목사는 2005년 일흔다섯의 나이에 찾아온 뇌줄중으로 2007년 12월 10일 그가 한순간도 놓지 않았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그를 믿는 사람들은 그가 평생을 짊어지고 간 짐의 무게 보다 남기고 간 희망의 무게가 더 크다는 사실에 슬픔을 뒤로한 채 3주기를 맞고 있다.

천상 민중이었던 가난한 목사

故 정진동 목사는 1932년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날 청원군 호죽리 동래 정씨 6대 독자로 태어났다. 손이 귀한 6대 독자라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가난 탓에 생계를 위해 품을 보태야 했다. 농사지을 땅 마지기도 변변치 않아 고사리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가마니와 짚신을 엮어야 했고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이면 어김없이 자신보다 큰 나무짐을 지게로 져 장에 내다 팔았다. 때문에 또래들 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성경학교를 거쳐 대한신학,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 신앙인이 되면서 갖게 된 민중사상의 바탕에는 바로 그가 자라온 과정이 적잖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처음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전도부 안에 산업전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 뒤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과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의 영향으로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했다.

그가 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개정을 통해 장기집권 태세를 갖추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10월 유신을 통해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국회 해산권을 갖도록 했다. 또한 임기 6년에 연임할 수 있도록 했고 대통령 선출 제도를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이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된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당시 지역에는 재야세력도 없었고 민주화를 내세우는 어떠한 단체도 존재가 불가능했던 때였다. 도시산업선교회는 그런 시대상황에서 숙명처럼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아지트가 돼 버린 것이다.

   
▲ 구약성서 미가서 1장. 권력과 갖은자에 맞서 민중이 대변인으로 평생을 바친 故 정진동 목사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재야의 상징, 넝마주이 목사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 먹는구나…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구약성서 미가서 1장 2절에서 3절의 일부다. 고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낮은 곳에 임한다’는 그의 신앙철학은 철저하게 기층 민중들을 끌어안았고 이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겠다며 넝마주이로 나서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억울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그를 찾았고 이들을 대신해 목청을 높이고 싸움을 하는 ‘불순한 목사’로 정권으로부터 낙인이 찍히게 됐다.

70년대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조광피혁 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벌인 보름간의 장기 단식농성이었다. 유신 말기로 접어든 1978년 초 조광피혁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와 지금의 파견근로자격인 신흥제분 노동자들의 임금체불, 소작농민 의문사 등 굵직한 사회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그는 재야와 종교계 인사 20여명과 3월 17일부터 보름간 단식농성을 벌여 복직과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농성자들이 만든 도토리나무 십자가가 도시산업선교회의 상징이 돼 지금도 예배당에 걸려있다.

하지만 고인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장남을 잃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직접 유인물을 작성하는 등 농성을 돕던 고인의 장남 법영군(당시 19세)이 한 병원 응급실에서 약물복용 증상으로 숨진 것이다. 누가 병원으로 옮겼는지 어떤 약물을 얼마나 어디에서 복용했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 훗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의문사’로 판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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