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재야를 고집한 대꼬챙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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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재야를 고집한 대꼬챙이 삶
  • 김진오 기자
  • 승인 2010.12.08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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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참여 끝내 거부, DJ에도 쓴소리

故 정진동 목사 3주기 

故 정진동 목사는 영면에 들던 2007년까지 민중만을 좇는 대꼬챙이 삶을 고집했다.

민주화운동은 70~80년대에는 재야 또는 전선운동으로 통칭됐다. 당시 군사정권의 거센 탄압에 맞서 정권퇴진을 주장하는 저항이 주를 이뤘고 그 안에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 문제가 부각됐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며 형식적 민주주의 확대 등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통령 직선제와 군사정권에 한쪽 다리를 걸치기는 했지만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으로 정치상황이 급변한 것.

   
▲ 뇌졸중으로 병석에 누운 故 정진동 목사를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가 위로하고 있다.
이때부터 시민운동이 싹트게 됐고 과거 재야운동가들이 대거 시민단체로 옷을 갈아 입었다. 운동의 영역도 정권반대와 노동자·농민 등 기층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서 지방자치와 환경, 여성, 복지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당연히 시민운동은 정부나 자치단체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물론 협력체계도 구축돼 갔으며 과거 재야운동의 맥은 노동현장이나 일부 진보단체로 이어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시민운동 확대 뿐 아니라 운동권 출신 정치인 배출과 정부나 지방행정조직으로의 진출로까지 이어졌다. 운동권 일각에서는 ‘세상이 변했다’는 자축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고인은 눈을 감는 그날까지도 넝마주이로 나섰던 그 모습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1997년 비판적 지지를 보냈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 축하모임에서 찬양일색의 발언을 잇는 기독교 관계자들을 일갈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위로부터 몇몇 사람이 바뀐다고 진정한 민주화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밑에서부터 변화가 오고 그것이 위로까지 힘을 미쳐 모든 게 변해야 된다’는 게 눈을 감을때 까지 꺾지 않았던 고인의 원칙이자 고집이었다.

고인이 떠난 후에도 인연을 맺었던 각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이같은 대쪽같은 성정을 기리고 있다.
김형근 충북도의회의장은 “목사님은 민중, 민중운동, 민중생존권 이것에 대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통일운동에도 민주화운동에도 다른 운동영역에서 항상 관심을 갖고 이런 운동들이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신 분이시다. 목사님으로 대변되는 운동의 기반이 있다. 도시산업선교회를 포함해서 우리 지역에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던 민중운동 역량이 그것이다. 목사님은 민중운동 부문이 이런 전선 운동에 함께 하게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그리고 자칫하면 각개 적으로 활동하거나 분열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지역 연대 운동의 중요성, 지역운동의 의미 이런 것들을 항상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박종희 (사)남북누리나눔 운영이사는 고인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중이 편에 설수 있었던 용기에 대해 “30여년을 뵈다 보니 목사님의 그런 활동이 용기로 보인다기 보다 운명처럼 느껴졌다. 일부러 용기를 내지 않아도 목사님은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고 태연자약하셨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감당하기 어렵고 힘든 상황에 닥쳐서도 목사님은 너무나 태연스럽게 자신의 갈길을 가셨던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눈물을 감춰야 했던 외로운 운동가”
인터뷰/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 전도사.
“1978년 큰 아들 법영이가 의문사 당했을 때였어요.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마당에 나와 보니 목사님이 우두커니 서 계신 거예요. 교회 마당에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달빛에 자세히 보니 묵묵히 잎사귀를 하나씩 하나씩 따고 계시더군요. 얼굴은 온통 울음빛인데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아들 잃은 슬픔을 그렇게 혼자 삭이고 계셨어요.”

故 정진동 목사 가장 가까이에서 평생의 민주화동지로 교회를 이끌어온 조순형 전도사의 회고담이다. 사적으로는 고인의 처제이기도 한 그는 30년도 더 지난 그 때 일을 아직도 눈물 없이는 되 뇌일 수 없다.

그는 고인을 ‘타협도 할 줄 알고 마음으로는 수없이 아파하면서도 쓴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신앙인이자 민중을 가슴속으로부터 사랑하는 운동가였다’고 설명했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큰아들을 영안실에 두고도 시청에서 파놓은 웅덩이에 아들이 억울하게 빠져죽었다는 한 아저씨의 울음섞인 호소에 그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손으로 진정서를 썼을 정도로 기층 민중을 위해서는 자신의 슬픔도 접을 줄 아시는 분이에요.”

고인이 떠난 후 마당이 있던 널찍한 교회는 가정집으로 이사해 지하실을 예배당으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작아졌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워있는 동안 치료비를 감당 못해 교회를 줄여 이사해야 했던 것.

하지만 어두컴컴한 지하지만 1978년 단식에 참여했던 농성자들이 만들어준 도토리나무 십자가 만큼은 예배당 한가운데 보기 좋게 걸려 있다.

“도토리나무 십자가에는 도토리를 털기 위해 몽둥이로 수없이 두드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아야 잘 익은 도토리를 얻을 수 있듯이 목사님도 그런 존재라는 의미죠.”
지하 예배당을 보여 달라는 부탁에 난방이 되지 않아 춥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가 도토리나무 십자가 앞에 서자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사실 정진동이라는 큰 나무를 떠나보내고 교회와 사회운동을 이어가야 할 조 전도사로서는 여간 부담이 아닐 터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신도라야 열대여섯명, 사회운동도 전문화·세분화 됐다.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 일꾼을 길러내지도 못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어느정도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해요. 교회터를 사고 예배당을 필요이상 크게 지었던 것도 각종 집회와 시국강연회를 열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죠. 이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또 교회를 책임질 새 일꾼을 어떻게 길러낼지 고민해야죠. 그래도 분명한 건 어떤식으로든 도시산업선교회가 민주화운동에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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