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 해결돼야 진정한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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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 해결돼야 진정한 민주화
  • 김진오 기자
  • 승인 2010.12.08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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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이념 초월, 인권상·장학회 등 추모사업 펼쳐
제1회 호죽노동인권상 허건행, 장학부문 이종수 군

故 정진동 목사 3주기 

故 정진동 목사는 노동·빈민운동에서 통일운동까지 아우른 흔치않은 운동가였다.
그는 70년대 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하면서 노동자와 빈민운동에 몰두하다 2000년대에는 통일운동에 이바지 했다.

이에 대해 조순형 전도사는 “목사님은 궁극적으로 민족문제가 해결돼야 민중문제도 풀 수 있다고 보셨다. 민중들이 핍박받던 70년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밖에 없었으며 시대가 변하면서 통일운동의 비중을 높여 오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 故 정진동 목사를 기리는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져 호죽노동인권상이 제정됐다. 사진은 2000년 당시 김영세 교육감의 비리의혹을 추궁하는 기자회견 장면.
고인의 흔적은 노동, 농민, 통일운동 등 지역 민주화운동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민주노총의 탄생에 고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했고 통일운동이나 시민사회단체에도 영향이 미쳤다.
호죽노동인권센터와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충북본부(6.15충북본부)는 고인이 직접 참여해 탄생시킨 대표적인 노동과 통일관련 조직이다.

고인의 호 ‘호죽’을 따 2008년 2월 설립한 호죽노동인권센터는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 저임금노동자 등 열악한 노동인권실현을 위해 노동상담과 노동관계법상의 법률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1000여건에 달하는 노동상담, 부당해고구제신청과 같은 법률지원활동을 해왔다.
또한 노동자 개인 뿐 아니라 노동조합에 대한 법률지원 및 교육활동등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법률상담 등도 병행하고 있다.

6.15충북본부는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 실현을 위한 지역조직으로 2006년 건설됐다. 6.15충북본부에는 종교, 청년, 시민사회단체 등 32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다양한 통일문화행사와 자주,평화통일 관련 지역민이 함께 참여하는 다양한 교육, 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한 추모사업도 시작됐다. ‘호죽 정진동 목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그 첫사업으로 호죽노동인권상을 제정한 것이다.

호죽노동인권상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 및 개인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활동가부문과 활동가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장학부문으로 나눠 수상자를 선정한다.

제1회 수상자로 활동가 부문은 허건행 전교조 충북지부 부지부장, 장학부문은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 의료연대충북지역지부 김태윤 조직국장의 자녀 이종수 군(인터넷고 1)을 선정했다.

허 부지부장은 1999년 전교조 가입 후 충주농고 분회장, 예성여고 분회장 및 학교운영위원, 전교조 충북지부 충주지회장, 충북지부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다 지난달 민주노동당 후원금 관련으로 교육청으로부터 해임 처분 징계를 받았다.

이종수 학생은 노동운동을 하느라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는 한부모 자녀임에도 전교 1등의 성적을 유지하는 등 주변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라 수상자로 선정됐다. 
장민경 호죽 정진동 목사 추모위원회 사무국장은 “거창한 사업은 아니지만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호죽노동인권상을 제정했다. 앞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의 노동, 농민, 통일 등 민주화 운동 전반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등에 계신 목사님께
김재수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 대표)

   
▲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
요즘도 목사님의 생전과 영면 직전의 모습이 가끔씩 떠오릅니다. 힘겨운 병상에서도 민주노총과 우진교통을 말씀하실 때면 항상 뜨거운 눈물이 앞섰던 모습이 선명합니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그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 민주노총과 우진교통에 대한 열정과 기대를 여전히 대신하였을 겁니다. 

목사님 삶의 주요한 부분은 소작농, 도시빈민,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였습니다. 권력과 자본 하에서, 초보적인 인권조차도 짓밟힌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부드럽고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고 보듬어준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권력과 자본에게는 엄정하셨습니다.
친분이 깊었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최고 통수권자의 초청에도 “청와대에서 차 한 잔하며 어떻게 거기서 쓴소리를 하겠느냐”시며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께 제가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살아 생 전, 목사님께서는 조직운동, 집단운동(단체) 내에서 어떤 관계를,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요? 왜 그리 비주류만 고집하셨는지요? 혹은 조직(집단, 정파)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 중에 어떤 것을 우선하셨는지요?
이걸 여쭙고 나니,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의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상상 이상으로 컸습니다.
그런 목사님이 민주노총에서 활동하던 제게 무엇을 가장 바랬을까요? 목사님이 살아 생전에 더 이상 도시산업선교회에 상처받은 노동자들의 발길이 뜸해졌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민주노총과 같은 민주노조 운동 단체가 성장해 이제는 본인과 교회를 찾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 많이 뿌듯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민주노총과 같은 힘 있는 단체가 지역의 제반 민중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내심 서운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생애 마지막 까지도 직접 나서 상처받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안아주신 것 같습니다.
‘작은 차이, 집단의 사소한 이해관계로 사람을 가리지 말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늘 함께하거라’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호죽노동인권센터의 출범을 매우 기뻐 하셨을 것 같고, 현재의 지역노동운동 상황에 대해서 저는 큰 꾸지람을 받았을 겁니다. 당신께서 해왔던 그러한 삶처럼 ‘낮은 자의 고통’을 받아주는 더 많은 도시산업선교회, 더 많은 노동인권센터가 필요한 현실이라고.
목사님께서는 기득권을 항상 멀리하셨습니다.

충북 노동운동의 선구자이었으면서도 우리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셨습니다.
제 살을 내 놓으며, 자식을 살리기를 바라는 ‘진짜 엄마’와 같은 넉넉한 모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정한 최고의 신뢰를 민주노총에게 주셨습니다.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도, 목사님의 살아 생 전 가르침으로 비추어 연상을 해보면, 현재와 같은 외형적인 조직화 중심의 운동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들(비정규직)의 마음을 받아주고 신뢰를 회복하는 내적인 비정규직 신뢰운동과 외형적인 조직화 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셨을 것 입니다. 정규직(노조)들의 마음이 진정으로 비정규직과 연대하도록 내부 반성과 교육. 그리고 작지만 진정성 담긴 연대를 아쉬워하셨을 겁니다. 낮은 자세로, 밤 한 톨도 기꺼이 나누는 마음을 바라고 또 바라셨을 겁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역사에 대한 확신이며 노동운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무등의 땅에 계신 목사님, 우리 목사님!
민주노총과 우진교통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후배들이 ‘나,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그럴수록 ‘더 낮은 곳으로, 더 소외된 곳으로’ 찾아가는 목사님의 정신 앞에서 정말로 부끄러워지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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