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순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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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순서처럼
  • 충북인뉴스
  • 승인 2012.07.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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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중 건축가, 한남대 건축가 교수

건축 설계란 ‘그 자리’에 꼭 어울리는 ‘그런 집’을 만들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생각으로 짓는 ‘사유의 집’에서 형태와 공간으로 짓는 ‘언어의 집’에 다다르기까지, 그 긴 여정이라고 할까. 사유의 집짓기는 언어의 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기초공사나 다름없다.

생각이 부실하면 형태도 허술할 수밖에 없으므로 사유의 집만큼은 건축주도 건축가와 함께 건실하게 지어야 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지 않는가? 자칫 생각과 판단 이 모자라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집이 아니라면 굳이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집다운 집의 열망이 어설픈 불발로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사유의 집부터 잘 지어야 한다.

대지 위에 생각을 짓는 것! 그것이 건축의 기본이요 출발이다. 그런 연후에 형태와 공간이 뜻이 잘 소통되는 언어처럼 제대로 다듬어져 나가고 있는 지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하지만 사유와 표현이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지 못한 집이라면, 보기에도 민망하다. 이를테면 이렇다 할 아이디어도 없는데 그럴듯한 언어로 잔뜩 치장한 허울 좋은 집이 그렇고, 현란한 사유는 있으되 공감할만한 형태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집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집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왠지 거북하다. 결국 사유와 언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생각은 궤변이요 형태는 유희일 뿐 알맹이 없는 껍데기 건축이 되고 만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집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꼭 어울리는 ‘그런 집’을 지으려면 ‘사유의 집’에서 ‘언어의 집’을 끊임없이 오가며, 매순간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고민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안으로부터 상처를 뚫고 꽃을 피우듯, 그 인고의 기다림 속에 사유에서 언어로 가는 과정이 바로 설계의 요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계과정이란 정진규 시인의 <몸詩 55 -상처> 속‘꽃이 피는 순서’와 꼭 닮아 있다.
“속으로만 입고 있던 상처를 요즈음엔 몸에도 내고 다닌다. 흉하다고 사람들은 피한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꽃이라고 향내가 있다고 다가가 부벼댄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도망친다 요즈음 나의 상처는 속엣것이 넘쳐! 밖으로 기어나오고 있음이 분명한데 사람들은 自害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몸에다 칼을 댄 적이 없다. 꽃이 피는 순서는 밖에서 안이 아니다. 고마우신 햇살과 단비도 있으셨겠지만 안에서 밖이다. 일단은 고여서 밖이다. 눈으로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빠듯한 충만의 순서! 나는 그걸 아직 믿고 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시인은 말한다. 꽃이란 안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라고. 그 속내의 상처가 절정에 다다라 밖으로 피어 오른 꽃을 보면, 무형의 사유를 침묵의 언어로 바꾸어놓은 신비가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가 있듯, 깊은 사유와 영혼이 깃들어 있는 건축도 내밀한 태생의 과정이 있다.

건축가의 스케치를 보라. 그가 그리다만 꾸겨진 종이와 꾹 눌러 그린 자국에는 아름다운 꽃을 염원하는 두런거림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그가 그린 선들은 생각을 미처 따라 잡지 못한 형체의 잔해이며, 최선의 선택을 위해 몇 번이고 덧붙인 자해의 상처나 다름없다. 그 채근의 과정 없이 어떻게 아름다운 집이 세상 밖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지고지난의 ‘꽃이 피는 순서’를 수행하며 ‘그 자리.’ ‘그런 언어’가 극적으로 일치하는 순간을 포착해야하는 건 시인이든 건축가든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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