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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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미학
  • 충북인뉴스
  • 승인 2012.09.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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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중 건축가, 한남대 건축가 교수

노자 도덕경 11장에 “우리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든다. 그릇을 쓸모 있게 하는 것은 그릇 내부의 빈 공간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릇과 빈 공간사이 관계처럼, 건축공간은 그저 비워진 무(無)가 아니라 ‘채워진 빈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건축은 채워진 것과 비워진 것 사이의 교묘한 결합의 예술인 셈이다. 잘 비우고 동시에 잘 채우는 일이 건축 언어의 본령이라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잘 비워낸 공간의 가치를 외면한 채 집안 가득이 더 많은 물건 속에서 하인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문제는 여기저기 물건이나 장식에 치이다보면 공간 속을 서성이게 되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경우 더 커다란 공간을 마련하더라도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어느 새 물건이 더 늘어나 소품이나 가구를 모시고 사는 꼴이 될 공산이 크다. 꼭 필요한 것 이외에 더 크게 비워내려는 노력만이 그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혜라 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새 집을 짓기 위해 자신이 살던 집을 헐어본 이들은 빈 공간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몸을 뉘였던 방 하나가 이토록 작았는데 무엇으로 그득 채우며 살았었는지 기적 같지 않았던가? 폐허처럼 부서져 있는 방을 하나하나 잘 살펴보라.

가득이 부서지는 햇빛을 얼마만큼이나 받아들였는지, 이 방과 저 방 사이로 툭 터진 시선 안에 들어오는 풍경을 방 안에 얼마나 잘 담았는가, 그리고 저편 나무 위에 앉아 청명하게 울어대는 새소리에 깊이 빠져들어 보았는지, 마음을 비워 추억해보라. 어쩌면 너무도 많은 것들로 채워 정작 채웠어야 할 것들을 오히려 몰아내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해보는 것만으로도 그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요즘의 세태에 비추어 좀 지나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비움의 미학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옛 선비들의 비우(庇雨)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를 피할 만큼만의 두 세 칸에 지나지 않는 작은 집속에 조촐하게 사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다.

경이로운 것은 사계 김장생(1548~ 1631)이 “십 년을 경영하야 초려삼간 지었나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라고 노래했듯이, 집은 비워져 있지만 오히려 집 주변의 청풍명월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역설에 있다. 거기서 집은 한 그루 작은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어디 그 뿐인가. “빈창에 눈보라 치고 / 촛불 그물거리는 밤 / 달빛에 걸러진 솔 그림자 / 지붕머리에 어른댄다. / 방 깊어 알괘라! / 산바람 지나가는 줄. / 담 너머 서석거리는 / 으스스 댓잎소리...”

마찬가지로 이우(1469~1517)의 시 속에도 집이 없다. 그 존재는 있으되 그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다면, 창이나 툇마루나 정자, 지붕만이 정경 속에 묻혀있을 뿐……. 집은 더 이상 비워질 수 없을 만큼 비워져 집주인은 바람, 구름, 달과 새와 함께 은밀하게 소통하며 하소연하거나 온전히 즐길 일만 남아있다.

그렇게 크게 비워낸 집은 물리적으로 왜소할지 모르나, 정서적으로는 우주 스케일에 맞닿을 만큼 넓고 높기만 하다. 더 많이 비워서 채워진 것은 놀랍게도 몸을 일깨울 만한 집 주변의 대자연이며 우주다. 그렇게 비워낸 만큼 감각과 의식은 자신의 내면에 갇히지 않고 외부 세계를 향해 더 커다란 자유와 상상력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비움의 미학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집이 크지 않으면 크게 비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다. 당장 방 한 칸만이라도 크게 비워보시라. 기적처럼 그곳이 곧 세상의 중심으로 뒤바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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