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쓰러뜨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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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쓰러뜨린 것
  • 신용철
  • 승인 2012.09.2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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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위원 투고 - 윤석주 청주중학교 교사 퇴직

태풍은 초대 받지 못한 손님입니다. 먼 남쪽 바다로부터 빠르게 올라옵니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건만 늘 외람된 모습으로 온몸 가득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납니다. 그는 언제나 무례하고 도발적입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를 떠밀며, 정박 중인 배라도 눈에 거슬리면 바닷속으로 쑤셔 넣기 일쑤요, 쉽게 방파제를 허뭅니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 하늘로 솟게 만들지를 않나, 납작 엎드린 집채도 날리지를 않나, 달리는 화물차 버스를 쓰러뜨립니다.

위성에서 내려다 보면 왼돌이 환상 모양을 하며 이리로 저리로 치닫는 게 보인답니다. 그 볼라벤의 난장질에 하릴없이 유리창에 신문지나 바르고 있다가 텔레비전 자막에서 ‘괴산 왕소나무’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습니다.

육백 살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질풍노도 볼라벤에 의해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온통 붉은, 뒤틀린 몸통에다 수피는 얇게 갈라져 용의 비늘 같고 뿌리가 내려가는 밑둥치 는 용의 발톱을 닮아서 용송이라고도 불리는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백두대간을 어버이 삼아 동쪽에 조항산, 서쪽엔 백악산, 남쪽에 속리산, 북쪽엔 대야산 그 한가운데 좌정하여 한반도의 중심을 지키던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우리나라의 배꼽에 해당된다는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두 소나무는 없어지고 마지막 남아 솔숲을 지키던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육백 살 이쪽저쪽이면 단군 할아버지 아사달에 도읍한 건 기억 못하시겠지만 백제, 고구려, 신라며 고려적 이야기를 풍편으로는 들었을, 조선 왕조 전 시대를 살아 조선팔도 행정조직 때부터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물론, 동학 농민군, 을사늑약, 안중근 이토 총살, 경술국치, 삼일 만세 운동과 광복, 육이오 전쟁, 사일구 학생혁명, 오일팔 민주화 운동......

민족의 흥망과 성쇠를 한 자리에 서서 다 보았던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아무 때고 찾아 가면 장한 모습으로 서서 우리를 반기던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한 번이라도 그 곁에 서 본 사람이면 평생 잊지 못할 모습으로 위엄과 신령, 그 자체였던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나무를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후원자요 격려자요 어르신이었던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지난달 주민의 제보로 진단과 치료를 받고 난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우리의 전문가도, 관계자도 모두 ‘아직은 괜찮다’는 왕소나무가 쓰러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볼라벤이 쓰러뜨린 게 아니고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하는 우리들의 무지와 안일함과 게으름이 왕소나무를 쓰러뜨렸습니다.

쳐들린 뿌리 부분을 보호하느라 쌓아 올린 붉은 흙더미가 마치 봉분 같아서 눈물이 납니다. 강풍에 노출된 나무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두 손 들고 바람을 맞을 뿐입니다. 나무는 흔들리며 속절없이 가지를 부러뜨리고, 무수한 이파리를 떨굽니다. 이제는 누운 왕소나무를 보고 오는 길가의 나무들이 다 중병을 앓고 난 환자처럼 휑하니 애처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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