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무 역사의 오솔길]월오동 양수척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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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 역사의 오솔길]월오동 양수척 효자비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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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가난 버들고리 손때 묻은 쪽마루 집/ 무자리 거친 한을 얼기미로 걸러낸다/ 대나무 굵은 손마디 허기지던 깊은 신음/ 낮과 밤 삭힌 설움 풍지는 또 서서 울고/ 들기름 지글지글 효의 심지 달구어 내니/ 어버이 잔기침 속에 숨어살던 오르막 길/ 흙먼지 자욱히 일어 분간 못할 황폐함을/ 천민의 마음자리 마른 풀로 뜯기어도/ 돌 비에 새긴 아픈 효 홀로 비를 맞는다.”

20여 년 전, 청주시 월오동 길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양수척(楊水尺) 효자비를 취재하며 그 효심을 시조로 읊어본 것이다. 당시에는 청원군 월오리였는데 그후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무자리는 조선시대에 키나 체를 만들어 팔던 천민 집단으로 양수척(楊水尺)이라고도 불린다. 무자리 마을은 양반이나 평민 동네와 약간 떨어져 있다. 일정한 거처를 마련하여 정착하는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유랑생활도 하였다.

교육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 거의 까막눈이었고 평민과 어울릴 수 없는 왕따 하층민이므로 성정 또한 거친 편이었다. 조선후기 월오동에는 양수척 3형제가 살았는데 패악질이 심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물론 툭하면 동네사람들을 두들겨 팼고 잔치집이나 초상집을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동네사람들이 이를 말리려 해도 양수척 3형제의 힘이 워낙 장사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효자마을(효촌리)에 와 있던 이산(尼山)현감 경대유(慶大有)가 양수척 3형제를 불러 인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나 경대유의 높은 학식과 가르침에 이들은 교화되기 시작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망나니 취급을 받던 양수척 3형제는 드디어 새사람으로 태어났다. 부모를 극진히 모심은 물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지난날 과오를 사죄하였다. 날 짐승인 까막까치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무자리라 한들 어찌 인간의 도리를 모르겠는가.

그들은 면피용으로 효도를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모를 섬겨 소문난 효자가 되었으니 개과천선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동네 사람들은 무자리 3형제의 효행을 기려 마을 입구에 ‘양수척 효자비(楊水尺 孝子碑)를 해 세웠으니 이때가 지금부터 140여 년 전인 1860년(철종11년)의 일이다.

높이 114.5cm, 너비 34.5cm, 폭 23cm의 돌 비에는 ‘양수척 효자비’라는 여섯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오랜 세월 길가에 방치된 데다 비바람에 마모되어 글씨를 판독하기가 어렵다.

신분 구별이 뚜렷하던 조선시대에 천민의 효자비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송덕비, 충효비, 효자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돌 비는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상민이 함부로 비를 세웠다가는 큰 코를 다치는 시대에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보태 천민의 효자비를 세웠으니 신분을 극복한 효행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전국을 통틀어 보아도 양수척의 효자비는 여기밖에 없다. 드문 형태의 돌 비이나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여태껏 길가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 비는 금석학적인 가치보다 비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 중요하다.

돌 비는 주인을 잃었으나 효행은 글자로 남아 있다.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그 사연이 빛을 발할 만도 한데 몇몇 사람의 입에서 떠돌 뿐이다. 월오동 공원묘지를 오가는 차량은 많으나 이 비를 돌아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충효의 고장 명성에다 이름 값을 보탠 양수척의 행적이 후세의 귀감이 될 만도 한데 지방문화재에서 빠져있을 만큼 푸대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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