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무의‘역사의 오솔길’]숲속에 숨어있는 산성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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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역사의 오솔길’]숲속에 숨어있는 산성옛길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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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 숨어있는 옛길엔 그리움이 널려있다. 옮기는 발걸음마다 향수(鄕愁)가 채이고 참나무 상수리나무에선 조선 바람이 인다. 들꽃은 물오른 꽃대로 그 바람을 연주하고 벌, 나비는그리움의 조각들을 물어다 비밀의 장소에 밀봉해둔다.

상당산성에서 것대산 봉수대를 지나 명암지로 이르는 길은 열린 듯 닫힌 길이다. 산업화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도 간신히 연명하여 역사 탐방객을 꾸준히 끌어들이고 있으니 열린 길이요, 조금 있으면 상봉재를 관통하는 큰 도로가 날 모양이니 닫힌 길이다.

청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잔영(殘影)이 결단날 판이다. 이제는 새마을 운동에서 민족적 요소를 보존하는 헌마을 운동을 펼쳐야 할 것 같은데 개발의 논리는 여간해서 그런 감성적 논리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당장은 숲 속에 포복해 있는 옛길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생활에 지친 도시인의 찌든 마음을 풀어주고 역사의 산소를 공급해 주니 정신의 영양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질적 재화는 일시적이요 정신적 재화는 영원한 것이나 눈앞 편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으레 가시적 효과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 편의주의 앞에 내 고장 역사의 마지막 숨결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헐떡이고 있으니 이 또한 현대화의 역기능이다.

보은에서 청주로 향하는 지금의 국도는 미원~고은 삼거리를 지나 막 바로 청주로 진입하나조선시대의 국도는 보은 ~회인을 거쳐 고은 삼거리에서 방서동으로 접어들었고 여기서 선도산 것대산 자락을 끼고 돌아 상당산성에 이르렀다.

상당산성에서 청주읍성에 이르려면 것대산 봉수대가 있는 상봉재를 지나 명암지 뒤편을 통하는 이 길을 이용했고 진천 방면으로 가는 과객은 서문을 통해 율봉역(栗峰驛:율량동)으로 길을 잡았다.

숲 속에 묻힌 옛길에는 상당산성에 기거하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송덕비가 길가에서 사열을 한다. 비바람에 닳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비문 글씨를 갈아먹으면 득남한다는 속설에 속살을 내주었다.

줄잡아 비문은 10여기에 달하나 판독이 가능한 것은 ‘兵使 田文顯 不忘碑’(병사 전문현 불망비) 1기뿐이고 나머지는 부분 판독만 가능하다. 이 비문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 암벽에 돋을 새김(양각)과 오목새김(음각)을 병행하였다. 비 갓(지붕 돌)은 부조형식으로 처리했으며 비문은 오목 새김이다.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비문을 만든 사례는 매우 드물다. 길가 산허리에 바위가 많으니 별도의 비신(碑身)을 세우지 않고 자연 지형지물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비문 중에 수컷 웅(雄), 사내 남(男), 호반 무(武)자 등이 수난을 많이 겪었는 데 이는 이 글자를 갈아먹으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기자(祈子)신앙서 비롯된 것이다.

현장에는 이외에도 여러 기자 습속이 널려있다. 명암지 가까운 산모퉁이엔 ‘아들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10여m 된다. 왼손 팔매로 바위 위 오목한 부분에 돌을 얹어놓아야 하고 오른손 팔매로는 50여m 떨어진 차돌백이(차돌이 있음)를 넘겨야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오늘날 야구로 치면 오른손은 강속구요 왼손은 슬라이더인 셈이다. 박찬호, 김병현, 송진우 등 이름난 투수들이 맹위를 떨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길은 역사요 숲은 전설의 고향이다. 그 역사의 향취에 취해 걷노라면 어느새 상봉재에 오르고 만다. 남도과객, 보부상도 한참을 쉬어가던 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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