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등대지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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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등대지기의 삶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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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간 등대지기, 바다 등 지고 뭍으로>


머나먼 항해를 마치고 어둠 속에서 항구로 돌아 오는 한 척의 배.

뱃머리로 물길을 두 갈래로 나누는 것도 힘에 겨운 듯 점점 작은 포말을 자아내 며 귀항하는 배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먼발치에 보이는 등대의 아련한 빛 한줄기다.

그 등대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불을 밝히던 27세 청년은 어느새 해풍에 주 름이 깊게 패인 60세 노인이 됐다.

인천항 팔미도 등대장 허근(許根.60)씨.

그는 오는 30일이면 정년퇴직과 동시에 33년간의 등대지기 생활을 마감하고 뭍 으로 돌아간다.

71년 9월 교통부 해운국(해양수산부 전신)에 근무했던 사돈의 소개로 등대원 시 험을 보게 된 허씨는 합격 후 인천시 옹진군 부도에서 등대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등대지기 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진 않았다.

등대원 초창기 시절에는 등대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 경유 두 통을 지게에 짊어 지고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든 야산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했다.

지금이야 태양열 발전기로 등대와 숙소의 난방및 전기를 해결하지만 그 당시에 는 땔감도 직접 구해야 했고 여의치 않을 땐 냉방에서 덜덜 떨며 겨울밤을 지새워야 했다.

또 일출 후에 등대불을 켜 둔 채로 놔두면 등명기 프리즘이 태양열에 탈 수 있 기 때문에 항상 일출 전 30분 전에 일어나서 등대불을 꺼야 했다.

삼시 세끼 손수 밥을 지어야 했고 하루 5차례씩 풍향, 풍속, 파고 등을 체크해 기상관측 결과를 기상대에 보고해야 했다.

"사실 젊었을 때는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죠. 그러나 그 때마다 나를 버틸 수 있게 힘을 준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허씨는 등대원이 된 이듬해인 72년 2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부도 등대 기숙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세 자녀 중 둘째까지도 등대에서 갖게 됐지만 78년 팔미도 등대에서 일하면서부 터는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을 인천 육지로 보내고 혼자만 섬에 남아 등대원 일을 계속했다.

나머지 등대원들과 교대로 한 달에 한 번 일주일 가량 휴무일을 얻어 가족들과 애틋한 만남을 이어갔지만 가족을 뒤로 하고 섬으로 돌아가야 할 땐 일주일이 늘 짧 기만 했다.

"등대원으로 일을 하다 보니 섬에 묶여 있어 장인, 장모 회갑잔치에 참석도 못 했습니다. 대부분의 가족친지 경조사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너무 미안할 따 름이지요." 허씨는 33년의 등대지기 생활 중 모두 3차례에 걸쳐 13년 동안을 팔미도 등대와 함께 했다.

군사작전 구역 내 위치한 팔미도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허씨의 외 로움은 더했지만 인천항을 오가는 배들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여느 다른 등대에서 일할 때보다도 더 큰 사명감을 갖고 일을 했다.

팔미도 등대가 국내 최초의 등대로 격변의 한세기동안 수많은 배들의 친근한 길 잡이 역할을 하며 100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지난해 신축등대에 제 임무를 넘긴 것처 럼 허씨도 이제는 33년의 등대지기 생활을 마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 주게 된다.

"청춘을 등대에 바쳤지만 후회는 조금도 없습니다. 후회없는 삶을 살았으니 성 공한 거 아닌가요? 허허허..." 33년간 어둠을 밝혀 온 등대지기의 고단함이 넉넉한 웃음 속에서 녹아 버렸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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