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 거리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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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거리에 서다
  • 김기현 시민기자
  • 승인 200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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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서

미인은 동서를 막론하고 남성의 감성을 자극하고 뿐만 아니라 동성의 여인들에게도 부러움을 사는 대상이다.

선사시대나 고대, 중세와 근대를 통 털어도 어느 시대나 미인은 존재를 하고 이는 지역적 교류 통하여 아름다움은 유사한 모양으로 상징화 하게 된다. 아마도 미의 존재방식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는 있지만 시각적 대상의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 유럽 지역에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는 비너스는 중국의 홍산문화에서 출토되어 동서의 교류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미인을 비너스라 칭하기 시작했다. 비너스는 그리스 미의 신 아프로디테다. 비너스는 서양 문학과 미술 속에서 신화의 틀을 거부하고 여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독일 르네상스 작가인 크라나흐의 ‘비너스’는 그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선사시대 출토 유물 여인상을 비너스라 부르는 것일까? 이는 인류가 여인상을 제작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아름다움을 상징으로 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너스의 제작이유를 첫째 육체적 미의식에서 오는 이상적 여인의 사실적 작품으로 보는 견해, 둘째 풍요와 심리적 작용을 위한 호신의 부적으로 보거나, 셋째 가족을 보고하고 다산의 추구의 종족 수호신으로, 넷째 샤머니즘의 무녀상으로 보는 견해들이다.

   
▲ 조선 미인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에로틱한 그림의 대명사가 된 이 미인도를 통해 현재 우리가 꿈꾸는 미인 세계를 바라본다.
전체를 다보아도 상징과 사실의 중간에서 선사 비너스는 존재하고 있다. 문명의 발상과는 무관하게 비너스는 유럽을 통 털어 분포하고 있다. 1979년에는 중국 북방의 신석기 문화유적인 홍은 유적에서 유사한 비너스의 발견으로 세심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미의식의 동서교류로 보아야 할 것이며 문명과 다르게 성적 내면의 교류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혹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위하여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조선 풍속화가 중 신윤복의 미인도이다.

분명 기녀임을 머리모양이나 옷매무새로 알 수 있다. 오늘날에 비하자면 포르노에 가까운 그림이다. 옷고름을 풀고 있고 그의 표정을 보면 남정 내의 눈과 맞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내 다음 시간을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 흘러 비너스는 미인도로 미인도는 비너스로 문화의 변화된 취향 속에서 미술의 소재로 시대를 장식해 왔다. 미인도를 보면서 지난번 포르노배우들이 거리에 나선 일들이 생각났다. 사회 문제를 이슈로 질서를 회복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론은 그들의 진실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비너스의 얼굴과 몸만을 이야기하고 심리적 상상력을 표현하여 미의 관점을 희석해 놓았다. 그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이유로, 혹은 그들의 행위가 그러해서. 우리는 많은 미인들을 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새롭게 문 여는 가게마다 풍선과 커다란 음악 그리고 두 명의 비너스는 길거리의 시선을 모은다.

어디를 보아도 이상적 여인의 사실성이나 풍요나 주술적이어 보이지 않는다. 미인은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신윤복은 가녀린 기생의 몸에서 이미 예와 기가 배어있는 자태를 그려냈다. 디지털시대가 창조하는 미인은 아마도 일회성에 가까운 미인을 만들어 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도 미인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으니 여인이 꾸미는 일이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은 평등성에 비하되는 말로 오해를 받을 수 있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정말 미인은 어머니인데.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비너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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