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목 목사 집무실 추정 건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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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 목사 집무실 추정 건물 발견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4.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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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청주군수 민영은, 중앙공원서 율량동으로 이전동헌 ‘청녕각’이어 두 번째 발견,
시 보존대책 수립나서
   

   ▲ 장대석위에 정면 4간의 팔작지붕 건축양식의
       건축양식은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택지개발 예정지구에서 구한말 청주목 관아(官衙) 건물로 추정되는 고건축물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청주시가 파악한 현존 청주목 관아 건물은 동헌(東軒)인 ‘청녕각(淸寧閣)’이 유일하기 때문에 새로 발견된 율량동 고건축물의 지방 문화재적 가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화제의 고건축물은 율량동 골말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여흥 민씨 집 뒷켠에 자리잡고 있다.  
 
 82년전 청주시내 중앙공원 자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청주목 관아 건물의 일부를 축소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23년 구한말 마지막 청주군수를 지낸 고 민영은 선생이 자신이 집무실처럼 쓰던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시켰다는 것.

 고건축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장대석 기단 위에 팔각 주춧돌을 놓고 기둥 위에 큰 부재로 된 대들보를 걸었다. 건물 가운데는 마루가 깔렸고 좌우 양쪽에 작은 방을 설치했다.  

   
지난 13일 현장감정을 한 김경표 교수(충북대 건축공학과)는 “당초 5간 내지 7간 규모였던 것을 4간으로 축소이전한 것 같다. 팔작지붕의 형태나 전반적인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관아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둥, 대들보같은 부재는 원래 축조당시의 것이지만 서까래 등은 이전하면서 다시 쓴 것이다. 현재 청주 동헌(청녕각) 건물과 건축시기가 동일하거나 다소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밀조사를 거쳐 청주목 관아건물이 확인된다면 지방문화재로써 보존가치가 있고 원래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헌(東軒)은 고을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관아의 중심건물을 말하는데 현재 청원군청내에 청녕각이 자리잡고 있다. 김경표 교수는 여흥 민씨 집 고건축물에 대해 ‘목사가 거처하며 부집무실처럼 사용한 건물’로 추정했다. 정밀조사를 거쳐 건물 편액과 상량문 등이 발견되면 정확한 건물용도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청주군수였던 고 민영은 선생은 조선총독부의 요청에 못이겨 자신의 소유였던 문화동 땅을 새로운 도청 부지로 제공하고 철거대상이 된 청주목 관아 건물 중 3채를 율량동 터로 이전했다는 것. 민영은 선생의 손자인 민병완씨(72)는 “그때 큰 할아버님께서 군수 집무실로 쓰던 건물하고, 부속건물 2채를 율량동으로 이전했다고 들었다. 부속건물 2채는 양옥 살림집을 짓느라고 72년도에 헐었고 집무실로 쓰던 건물만 남아있는 상태다. 집안의 명예이자 역사인 만큼 청주시가 보존방안을 마련한다면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청주시는 청주목 관아 건물의 추가 발견여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1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앞두고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고건축물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는 조만간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 자문을 거쳐 여흥 민씨 고건축물의 청주목 관아 여부를 확인하고 보존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다. 보존방법으로는 청주목 관아가 위치했던 중앙공원으로 재이전하거나 율량동택지개발지구내 조성예정인 ‘율봉역’ 역사공원으로 재이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여흥 민씨 고건축물이 청주목 관아 건물일 경우 추정위치에 대해 김경표 교수는 “목사가 공무를 보는 동헌 청녕각과 부집무실이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 청원군청내 어느 곳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청주읍성안의 청주동헌 건물배치를 확인하고 고건축물 용도를 조사하면 위치파악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민영은 선생은 1870년 시종원 부경을 지낸 민영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금부 도사, 괴산군수를 거쳐 구한말 청주군수을 역임해 품계는 종2품 가선대부였다. 이같은 고위공직 전력으로 인해 주변에서는 ‘민구관(舊官)’으로 부르기도 했다. 여흥 민씨 집안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3명의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민영은 선생은 청주 일대에 엄청난 땅을 소유해 한해 만석을 추수하는 거부로 알려졌다. 당시 청주에서는 ‘민구관’이 소유한 땅의 규모가 크다보니 “동으로 80리, 북으로 50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는 것.
 
 구한말 청주의 마지막 군수인데다 재력가인 민 선생은 일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로 손꼽혔다. 충북도 참사, 청주군 금융조합장, 충주농공은행 설립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개화기 신교육에 대한 소신이 확고해 학교설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 사립 보성여학교, 보성중학교, 청주보통학교(현 주성초), 청주 제2고등여학교(현 청주여중), 석교초등학교 설립에 토지를 희사하거나 거액의 설립자금을 쾌척했다. 36년 김원근 영근 형제가 청주상업학교를 설립할 때도 상당액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1940년 가난한 식민지 학생들의 교육지원을 위해 도내 최초로 은성장학회를 설립했다. 당초 1만5000원에 사들인 사설 저수지(수세 300석)와 추수 200석의 토지를 출연했고 민옹이 사망한뒤 큰아들(민주식)이 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 미원 오창 일대의 오창면 낭성면 일대 토지를 추가로 출연했다. 전국에서도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은성장학회는 작년말까지 1009명에게 장학금 수여했고 총지급액이 81억여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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