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드는 역사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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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드는 역사그리기
  • 김기현 시민기자
  • 승인 2004.07.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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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역사를 그리는 화가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근대사를 그리는 화가는 우리미술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만큼 역사를 표현해내는 일이 개인에게 있어서 표현 기술이나 양식의 면에서도 철저한 자기정신과 처절한 역사인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신학철은 그래서 더 훌륭한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신학철 선생은 그를 만나서 이야기해본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이런 그림을...이라고 의아해 한다. 그만큼 온순한 성격의 소유로 내면의 강인함을 잘 보여주지 않는 특성이 있다.

   
▲ 인간의 내면 아니 내장을 보듯 역사를 헤져보여 진실의 사건으로 재해석해낸 작품이다.
이 그림(한국 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은 그의 첫 개인전에서 ‘한국근대사’ 연작중의 하나로 다시 전시되었고, 그때의 카달로그와 포스터에 실려 그 개인전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알려짐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전람회에서의 작품 감상은 일상세계와는 다른 비일상적 존재이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건 우리의 일상적 의식과 행동에 개입하고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람회에 가고 작품을 대하는 동안은 적어도 일상성에서 벗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우리는 오늘날 이 비일상적 행위가 점점 일상화 되고 있음을 경험한다. 전시회가 열리면 습관적으로 가고, 작품에 대해서도 습관적인 자극과 반응으로 그친다. 전통적 미술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를 바 없다.

그 원인은 현대의 생활환경 전반의 일상화, 온갖 자극에 따른 둔감의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미술이 비현실적인 삶의 세계를 추구하고 그 세계에 대한 자극과 반응이 과잉적 이라는 데 있다.

   
▲ 들판을 가로지르면 용오름처럼 역사가 소용돌이 친다. 그림앞에 서면 관객은 숨을 멈추게 된다.
비현실적인 삶의 세계, 곧 특이함의 세계는 그것대로 이해되고 공감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당내의 삶과 무관할 때 다음 순간 기억의 창고에 쳐 넣어 지거나 버려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면 그 자체가 하나의 덫으로 화하는데 우리의 현대미술은 바로 그러한 덫 -‘비 일상화의 일상화‘ 에 걸려 있다고 보아진다.

화가 신학철의 작품을 보는 일은 이 같은 ‘비 일상의 일상화’,로 역사를 의식적 교육에 박제된 사고를 뒤집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보면 화가 신학철은 비 일상이 일상화되고 있는 우리 화단에서 이 뒤집혀 있는 관계를 되돌려 놓고 있는 작가이며, 그 점만으로도 가히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를 탁월한 화가로 보는 것은 이런 점에서가 아니고 다른 시각에서 인데, 한마디로 그가 ‘사고하는 화갗 라는 사실 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실 사고하지 않는 화가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뜻은 사람은 누구나 독특하게 생각한다는 뜻에서가 아니고 신학철은 드물게 창조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화가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창조적인 사고를 해왔다는 것은 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과 그 후 그리고 지금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60년대 말 전위그룹 중의 하나였던 “A. G"의 동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낡은 미술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의 미술로서 전위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사고 방법을 왕성하게 경험했다.

현대의 수용에서 현대를 보는 시각을 달리하며 근대를 읽어내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작가로서 행복한 일이다. 고뇌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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