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군 산척 양조장 습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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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군 산척 양조장 습격 사건
  • 김남균 기자
  • 승인 2016.06.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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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출신 당선자 선거사무원 피습…당시 90명 연행
판세 불리하자 무소속 출마… 이후 반민주행위자 선정
▲ 1960년 8월 1일 선거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피습당했던 옛 산척양조장 터.

기록되지 않은 4·19
① 미완의 혁명
② 타오른 불꽃
③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Ⅰ
④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Ⅱ
⑤ 끝나지 않은 4·19

‘쾅, 쨍그랑’ 술 항아리가 깨지면서 독에 있던 막걸리가 바닥으로 콸콸 쏟아졌다. 충주시 주덕면에서 온 한 무리의 청장년들이 산척양조장 사입실을 습격해 술 항아리들을 망치와 몽둥이로 모두 깨뜨려버렸다.

1960년 8월 1일 밤 10시경 일무리의 청년들이 주덕역에서 막차 기차를 타고 영덕리에 있던 독동역에 내렸다. 이들은 산척면에 사는 육 모 씨를 찾아내 구타하고 산척양조장을 습격했다. 산척양조장은 최 모 씨가 운영하던 것으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중원군 후보자 정상희의 사무장을 맡아 일을 했다.

▲ 안규진 씨

산척면사무소 옆에 있던 양조장 사입실이 습격당한 이유는 뭘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안규진(79세. 충주시 산척면)씨는 “습격한 사람들이 주덕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안 씨는 “주덕에서 청년 16명이 왔다. 청년들이 양조장을 때려 부수는 걸 면사무소 마당에서 똑똑히 보았다. 나는 급하게 지서로 전화를 해서 신고했다”며 “이들은 양조장을 부수고 산척 상영마을 김 모 씨 집으로 가다가 충주경찰서에서 온 경찰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고 잡혀 갔다”고 말했다.

목격자 안규진 씨는 당시 산척면사무소 소사로 일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봤다. 당시 중원군 주덕읍에서 온 청년들은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당 민영수 후보의 지지자들로 추정된다.

당시 충북신보는 정상희 당선자와 사무장, 선거운동원 집을 파괴한 내용을 보도했다. 충북신보는 “중원군에서는 7월 30일 오후 5시경 동량면 제5투표구에서 개표가 중단됐다. 개표도중 34표가 부족해 문제가 된 것이다. 개표장 밖에 있던 일부 군중들이 항의하면서 개표가 중단되었는데, 31일 오전 1시 30분 개표를 재개했다. 8월 1일 오후 8시경 지역주민들은 당선자 정상희와 선거사무장 집 등을 습격해, 가옥을 파괴했다”(충북신보 1960년 8월 2일자)고 보도했다.
 


“창씨 개명도 안하더니”

충북신보는 이어 이들의 재판 소식도 전했다. 충북신보는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90여명을 연행했다. 1960년 12월 27일 청주지법에서는 피고 12명에게 2년 내지 1년을 언도했다. 정상희는 자유당 소속의 제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4월 혁명 당시에는 자유당 중원군당 위원장을 맡았었다. 정상희는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후보 민영수와는 136표의 근소한 차이였다”라고 보도했다.

중원군은 현재는 없어진 행정구역이다. 옛 충주시를 원형을 둘러싼 지역인 주덕읍, 가금면, 금가면, 노은면, 동량면, 산척면, 살미면, 상모면, 소태면, 신니면, 앙성면, 엄정면, 이류면 등 1개읍 12개면 136개 동리가 중원군이었다. 중원군은 1995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충주시에 통합되었고, 중원군이란 명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중원군의 1950~60년대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어땠을까? 당시 주덕읍에 살았던 조주연(85)씨는 “제대 후에 귀향해서 3.15 부정선거를 겪었다. 자유당 시절엔 지서장과 면장이 자유당 가입을 종용했던 해괴한 시절이었다. 하루는 지서장이 와서 자유당 입당원서를 주며 입당하라고 했다”며 “물론 거절했지만 당시는 그런 시절이었다”고 밝혔다.

친인척을 동원해서 자유당 입당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 씨는 “또 하루는 주덕면장을 하던 조○○ 재당숙이 ‘너네는 이상하다. 다 창씨개명 하는데 (너네 가족은) 하지 않고, 다 자유당 입당하는데 (너네 가족은) 하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압력을 넣었다”고 밝혔다.

조 씨는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조씨는 “선거를 하는데 3인조 공개선거가 횡행했다. 4할 사전 투표함을 마루보시 트럭에 싣고 가던 일도 기억 난다”고 말했다.

4월 혁명 직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당 바람이 핵폭풍처럼 불었다. 자유당 깃발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정도로 인기가 곤두박질쳤다. 그러다보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유당 중책을 맡았던 사람들이 무소속 깃발을 들고 나왔다. 정상희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로, 그는 3.15 선거 당시 자유당 충북도당 위원장이자 중원군당 위원장을 맡았었다. 그런 사람이 4개월 만에 무소속의 깃발을 움켜쥔 것이다. 정상희 뿐만 아니라 민주당 민영수를 제외한 중원군 후보들이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괴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출마한 주요 후보 차점자인 민주당 민영수 후보는 검사 출신으로 ‘이승만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돼 징역살이를 했다. 1955년에 발생한 이 사건은 후일 김창룡 특무대(CIC) 대장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영수 후보는 제2공화국에서 현재의 감사원장격인 감찰위원장을 하다 5.16쿠데타 후 공직에서 물러났다.

3위를 차지한 이희승 후보는 동경 중앙대 법학부 출신으로 여러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충주·중원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안’

당선자 정상희는 노은면 출신으로 양정고보와 동경 명치대를 졸업했고, 학창시절부터 육상선수 활동을 했다. 일제강점기시절에 ‘조선육상경기협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1943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경성부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해방 후 대한체육회 이사장과 삼호무역 회장을 했고 이기붕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당시 정상희 씨의 위세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전해졌다. 조주연 씨는 “정 씨는 이기붕의 문고리이자 재계에서는 이병철을 능가하는 실력가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병철씨와 정상희와 사돈을 맺었다. 정 씨의 차남 재은씨와 이병철의 삼녀 명희씨가 결혼했다”고 밝혔다. 이런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휘두르던 정 씨도 7.29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차점자 민영수와는 136표 차이였고, 부정개표 논란까지 빚어졌다.

이렇게 국회의원에 턱걸이한 정상희 당선자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의원에서 1960년 12월 31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안’을 통과시켜 당일로 공표했기 때문이다. 1961년 2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 법에 의해 충북지역에서 자동케이스로 공민권 제한대상으로 조사를 받게 되는 이가 37명 이었는데, 그중 정 씨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법은 5·16 군사쿠데타로 유야무야 되었다.

7.29 선거 후 중원군에서 당선자 정상희와 사무장, 선거운동원 집을 파괴한 것이 단순히 민영수 후보 지지자들의 폭동으로만 그 의미를 국한할 수는 없다. 그 행위의 이면에는 반혁명세력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었고, 부정개표에 대한 저항활동을 한 측면도 있다.

법률에 의해 반민주행위자로서 공민권 제한이 된 대상에 정상희씨가 포함됐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취재=김남균 기자·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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