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석, 그의 죽음앞에 되살아나는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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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석, 그의 죽음앞에 되살아나는 기억들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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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불명예, 그러나 민선시대 상징적 인물

   
변종석 전 청원군수가 오랜 투병 끝에 지난 21일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타계 소식은 주변 사람들에게 숱한 기억들을 새롭게 되살려 냈다. 변 전군수가 걸어 온 길이 범상치만은 않은데다 1995년 민선 1기 자치단체장에 오른 후 공인으로서 그가 어어 온 행적 역시 많은 얘깃거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변종석 전군수의 말년은 불행했다. 청원 스파텔 사업과 관련,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후 대법원까지 가는 지루한 법정다툼 끝에 결국 혐의를 벗지 못하고 공직을 마감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엔 이 사건으로 인한 ‘흠집’이 항상 주홍글씨처럼 따라 다녔고, 사후에도 일반인들의 인식 역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같다. 그러나 그가 걸어 온 길은 자치단체장으로서의 실정법 위반과 구속이라는 어두운 상흔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기억들을 안겼다.

고교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했고, 오랫동안 충북축구협회장을 맡을 정도로 체육인이었던 그가 공직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계기는 1995년 6월 민선 1기 지방선거다. 지역에서 경기단체장과 골재사업을 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새마을, 학교동문회, 평화통일자문회의 등과 관련된 폭넓은 사회활동 덕에 많이 알려진건 사실이지만 현직이자 집권당(자민련) 후보인 오권영 전 군수를 이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투표날 일찌감치 귀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당시 거센 돌풍으로 불어닥친 녹색바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민련 변종석후보를 57·7%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시켰고, 아무것도 몰랐다가 집으로 쳐들어 온 기자들에 의해 당선을 실감할 정도로 그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졸지(?)에 자치단체장에 오른 그는 1998년 민선 2기 선거에서 41·2%로 재선된 후 스파텔에 발목이 잡히기 전까지 민선시대의 상징적 일과 해프닝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는 민선 자치단체장에 취임하자마자 군수실을 개방해 언론에 크게 조명되기도 했다. 군수실과 부군수실, 부속실까지 칸막이를 없애 모든 면담과 결재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수실을 방문한 한 사업가의 얘기는 군수실 개방의 후폭풍(?)을 실감나게 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한번은 성의를 표하기 위해 군수실을 찾았더니 사방으로 개방된 공간에선 도저히 건넬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점심식사를 모시기로 하고 먼저 빠져 나와 약속한 식당으로 갔는데 군청 간부들이 같이 있는 게 아닌가. 밥값이라도 내려 했는데 군수에겐 판공비가 있다며 스스로 계산하는 바람에 아주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청원군 공무원들은 스파텔 사건으로 변종석의 이미지와 ‘돈’이 매치되는 것에 몹시 안타까워 한다. 그가 돈문제에 있어선 깨끗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년에 그를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결정적 동기를 자식농사의 난맥상(?)과 몇몇 참모및 측근들의 보필잘못으로 본다.

한 공무원은 “군정의 수장으로 스파텔 문제를 그렇게 만든 것은 분명히 잘못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제대로 보필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는 행정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밑에 사람들에게 맡겼다. 만약 변군수가 약은 사람이었다면 어느 순간에 발을 빼 화살을 덜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믿고 평소 스타일대로 밀어붙인 게 화근이다. 본인의 체질상 세부적인 것까지 꼼꼼히 챙기지를 못했기 때문에 일이 꼬였다고 본다.

스파텔 사업은 전임자 때 이미 구상된 것인데 변군수가 의욕만 앞세우다가 실패를 본 것이고, 이를 제대로 진언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문제다. 물론 그분의 성격이 약간 와일드하고 한번 확신이 서면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참모역할이 어려웠겠지만 어쨌든 스파텔 문제는 실무차원에 책임이 크다”고 아쉬워했다.

사실 변 전군수는 취임하자마자 행정의 비전문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갖게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현장 확인행정’이다. 새벽 5시만 되면 각종 현장에 나타나 점검을 하고 아침 참모회의를 하다보니 경우에 따라선 간부들이 호되게 당한 것이다. 간부들이 현장에 가 보지도 않고 적당히 보고했다간 당장 “내가 방금 보고 왔는데....”로 시작되는 호통을 듣기 일쑤였다.

변 전군수는 현장을 찾기 위해 관용차도 아예 ‘무쏘’로 바꾸기도 했다. 관내 농민들에 대한 애착은 특히 각별했다. 농민들과 직접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애로를 청취했고, 어느 땐 농막에서 같이 자기도 했다. 그의 군수 재직시 면장을 지낸 한 관계자의 말이다. “한번은 군수님 시찰이 있다고 해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는데 오시자마자 논으로 찾아가더니 농민들과 같이 일하며 식사도 하고 막걸리도 마셨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농막에서 자고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황당했지만 농민들은 상당히 좋아들했다. 그 분의 농민 사랑은 솔직하면서도 대단했다.” 이런 일화 때문에 변 전군수는 지금까지도 청원군 농민들에겐 최고의 민선 군수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집단민원 대처에서도 체육인 출신답게 ‘담판’을 즐겨 사용했다. 대개의 집단민원은 그 최종 귀착지가 자치단체 청사이고 자치단체장과의 면담요청인데, 변 전군수의 경우 집단민원을 직접 찾아 설득과 해결에 나선 사례가 많다. 그 때마다 하는 얘기는 “일하고 농사짓기에 바쁜데 내가 직접 가지 군청까지 왜 오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스타일은 군의회와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났다. 간혹 자신의 시책에 군의회가 발목을 잡기라도 하면 해당 의원의 집을 새벽에 방문해 설득한 것이다. 군의원의 입장에선 되레 군수에게 아침 식사까지 대접하며 설득을 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서로 터놓고 얘기하는 데엔 상당한 효과를 누렸다는 후문이다. 군의회 집행부를 책임졌던 모의원의 경우 새벽에 잠을 자다말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속옷 차림으로 군수를 맞은 일도 있다.

변종석 전군수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엇갈린다. 추진력과 의리, 배짱, 소신, 따뜻함의 자치단체장에서 독선적이고 귀가 얇으며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도 쉽게 먹히는 파벌양산의 자치단체장으로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일각에선 민선시대의 ‘희생자’로 그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치단체장으로서 걸 어 온 길엔 소탈하고 의욕적이며 가식없는, 그야말로 군민들과 함께 하려는 ‘민선(民選)’ 의식의 족적이 누구보다는 풍부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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