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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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 육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05.03.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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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바람을 타고 온다.
대지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뾰족 뾰족 세상을 향해 문 여는 소리 들려온다. 바람은 살가운 햇살에 담아 온 꽃향기를 여인네의 치마폭에 우수수 쏟아 놓고 버들가지와 한참 열애중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온 대지는 시나브로 녹색의 향연 속으로 빠져든다.

오전 11시!
이시간이면 벌써 가게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이불 속에서 둥글고 있다. 아무도 없는 집, 아들도 학교로 가고 남편은 일찌감치 농장으로 떠나고 봄 햇살만 베란다 창으로 들어와 수선을 떨고 있다. 거실이며 방 안엔 이미 제 갈 곳을 잃은 옷가지들이 너절하게 널려 있고, 빨래 바구니엔 삶의 언저리에서 피곤에 지친 셔츠들이 모가지를 삐딱하게 뉘인 채, 내 손맛을 기다리고 있다. 햇살들이 떠드는 곳엔 숱한 먼지들이 일제히 일어나 소동을 벌였다. 아! 날보고 어쩌라고.

가게도 어제저녁에 미처 치우지 못하고 온 일들이 보란 듯이 널려져 있을 터인데, 할 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나는 무료했다. 아니, 그것은 무료함이 아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다. 매일 그렇고 그런 날들이다 보니 내 자신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빤하지 않은가, 어딜 가도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을 삶에 지친 나와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나! 먼 곳으로 피신했다 싶어 안도의 숨을 쉬고 돌아보면 언제나 제자리 뛰기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아내, 엄마, 주부, 실패한 사업 때문에 겪어가는 경제난, 나를 시시각각 조여 오는 그들은 내게 삶의 권태라는 오염 물질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공세를 가했다. 이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은 거다. 아주 멀리 달아 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 짧지만 입안의 박하사탕 같은 맛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거실과 방안을 수선스레 오가다 난, 일말의 일탈을 생각했다.

수화기를 들었다.

단 한 번 찍은 도끼가 적중을 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

차도, 시간도, 그 자신도 모두 내주겠다고?

손에 쥐어주는 자동차 키를 받아들고 운전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 키를 돌렸다. 어디로 갈 것인가 마음대로 가라며 그는 똑 고른 하얀 이를 드러내고 넉넉한 웃음을 던진다. 그는 바쁜 시간에 나를 위해 세차도 하고 정장차림의 모습으로 달려와 주었다. 박하향이 내 온몸으로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참! 오랜만에 잡아보는 운전대다. 부도가 나면서 내 차를 그냥 버리고 오다시피 했다. 나의 사랑스런 애마를 떼어놓고 돌아 서던 날, 그날이 도로 가운데에서 자꾸만 어정 거렸다. 순간 시야가 희끄무레 흐려졌다. 어느새 그는 한마디 해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슴에 두지 말고 지금부터 다 풀어 버리란다. 신나게 달려 보란다. 그리고는 넉넉한 웃음을 또 웃어주었다. 나는 어느덧 그의 향기에 훈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엑셀 페달을 꾸욱 밟았다.

봄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하던 일만 마무리 하겠노라며 잠시의 시간을 내게 허락 받았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하얀y셔츠에 잔잔한 무늬가 있는 감색 넥타이를 매고 조수석에 앉아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공사 견적을 뽑고 있었다.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노모에게서 온 전화다. 철저하게 자기 일을 해내고 여분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학교에 간 어린 손자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부재에 대해 걱정하는 노모에게 곰살스러운 아들이었고 어린 자식에겐 자상한 아빠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서 넉넉한 남자의 향기를 맡았다. 기대고 싶은 든든함, 안기고 싶은 푸근함을.

엑셀 페달을 밟고 있는 오른발엔 힘이 점점 가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물을 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끌려가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돌아보면 호수도, 숲도 아름답고, 나즈막한 산 아래 두세 두세 모여 사는 산골 마을도, 그 앞을 흘러가는 작은 시냇가도, 수형이 멋진 감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도 모두 정겹고 아름다웠다.

아지랑이 흔들며 다가오는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궤도를 이탈한 채, 자석에 이끌리듯 끌려가고 있었다. 또 다른 아름다움을 향하여.

도로가의 가로수들이 마구 흔들렸다.

봄바람에.
.
.
.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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