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를 짓밟은 군화자국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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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를 짓밟은 군화자국 ‘25년’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5.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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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법난 당시 법주사, 구인사 총검으로 유린
정부 진상규명 약속에도 불구 피해자들 굳게 입 닫아

1980년 10월27일 새벽 4시 ‘작전명령 X-45’라는 이름 아래 계엄군은 총으로 무장한 채 전국의 주요 사찰(조계종 중심)과 조계종 총무원을 군홧발로 짓밟는다. 이튿날 신문에는 “사이비 승려들과 폭력배들이 난무, 발호하고 있어 뜻있는 성직자와 신도들은 물론 일반 국민의 지탄과 빈축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계엄당국의 입장이 발표된다.

   
▲ 1980년 10.27법난 당시 계엄군에 유린당한 법주사 전경.

이후 11월14일에는 수사결과를 중간 발표했는데, “승려들이 부정 축재했거나 사유화한 재산이 200억원에 이르고 이 가운데 4억6000만원을 유용했다”는 내용이었다. 언론들도 ‘낮에는 승려, 밤에는 요정사장’ 등 원색적인 제목의 기사로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최종 수사 결과 발표 내용은 중간발표와 달랐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무혐의 처리됐고 재산 환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스님을 비롯해 153명을 연행하거나 수배했고 이 가운데 17명을 사법 처리한 채 작전명령 X-45는 상황종료된다. 불교계에서 최대의 치욕사건으로 여기고 있는 이른바 ‘10.27법난의 개요다.
이틀 뒤인 10월30일에는 군·경 3만여명을 동원해 전국 3000여개 사찰과 기도원 등을 이잡 듯이 뒤졌다. 대공 용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 역시 불교계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사건이다.

1989년 5공 청문회 당시 잠시 거론됐지만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고 1989년 1월30일 국방부가 발표한 ‘불교수사 경위’라는 문건을 통해서만 실체를 엿볼 수 있었던 10.27법난이 25년이 지난 지금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최근 조계종 총무원이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10.27법난을 공식의제로 다뤄줄 것을 요청했으며, 진상규명위 이해동위원장도 불교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해 공개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어 7월4일 불교인권위원회(공동대표 진관)와 조국평화통일불교협의회(회장 법타)가 ‘10.27 불교법난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10.27 법난 대책위의 상임대표를 맡은 법타스님은 충북 청원 출신으로, 청주상고 재학시절 한일굴욕외교에 반대해 1964년 6.3학생운동을 주도한 청주지역의 원조 운동권이었다.

10.27법난 왜 일어났나
10.27법난을 진두 지휘한 합동수사본부(본부장 노태우보안사령관)가 왜 불교계, 특히 조계종을 정화대상으로 삼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1989년 국방부가 발표한 문건에 따르면 조계종 내부의 종단분규가 법적인 공방으로 비화된 상태에서 1979년부터 청와대, 문공부, 검찰, 치안본부 등 각 기관에 불교계의 폭력, 사기, 부정비리를 수사해 달라는 건의나 진정, 고소가 계속됐으며,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국보위에도 진정 및 투서가 쇄도해 1980년 6월경 불교계를 정화하도록 합수부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당시 조계종은 이른바 ‘조계사파’와 ‘개운사파’로 나뉘어 반목이 있었지만 1980년에 들어서면서 확연하게 안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계종은 1977년 7월부터 1980년 4월까지 2년 7개월 동안 종단 운영에 관한 견해 차이로 법정 공방을 벌였지만 여러 건의 소송이 개운사파의 승소로 거의 확정되자 양측은 1980년 3월에 화해를 했으며, 이후 통합된 조계종은 10.27법난이 일어나기까지 안정과 화합을 바탕으로 종단 발전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이는 1980년 3월30일 조계사파(고암 종정·송원 총무원장 대행)와 개운사파(월하 총무원장·월주 종회의장)가 종단통합을 위한 합의조약서에 함께 서명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월주스님, 쿠데타 세력에 미운털
“신군부 세력의 정치적 시나리오에 의해 불교계가 무참히 짓밟힌 사건이다” 이는 법난 대책위 상임대표인 법타스님이 규정한 10.27법난의 성격이다.
합수부가 투서 작정자로 공개한 일부 스님들의 투서가 접수된 시점이 법난 하루 전인 10월26일이나 수사지시가 내려간 6월 보다 2개월 뒤인 1980년 8월로 확인됐기 때문에 투서가 빌미가 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일부 투서는 보안사 관계자가 작성한 뒤 스님들에게 서명만 받은 것으로 밝혀져 조작사건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불교계에서는 정치적 명분이 미약했던 신군부가 불교를 타겟으로 자신들의 등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썼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월주스님이 신군부의 등장에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보안사 소속의 이현식씨가 두차례에 걸쳐 월주스님을 찾아와 “구국영웅인 전두환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바란다”는 성명서의 초안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두환 옹립’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였지만 바티칸 교황청이 버티고 있는 천주교 대신 불교를 타겟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월주스님은 또 경찰관계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광주를 방문해 피해자들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해 신군부로부터 미움을 샀다.
월주스님은 이에 대해 불교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27법난은 신군부가 성한 사람의 배를 갈라 수술하려다, 수술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봉해버린 사건”이라며 신군부를 성토했다.

털어서 먼지만 나온 사건
합수부는 총검으로 무장한 계엄군을 사찰에 들여보내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련 스님들을 연행했지만 수사 결과는 ‘용두사미’ 격이 되고 말았다. 200억이 넘는 부정축재와 사유재산화가 있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환수는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 합수부는 사찰 명의의 재산까지 부정축재에 포함시켰다가 스스로 굴레에 빠졌으며, 200억6000만원이라고 발표한 부정축재 재산 가운데 178억원이 재단법인 화쟁교원의 재산으로 관계자인 경우스님에게 재산포기 각서를 써달라고 강요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군부가 민정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교재산의 국고환수를 노렸다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다. 정확한 진상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잠 안 재우기 등 각종 괴롭힘을 비롯해 무자비한 폭력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이 자행됐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이다. 또 법난에 연루됐던 스님 가운데 일부는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승적을 박탈 당하거나 세력싸움에서 밀려나는 등 지각변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계가 법난을 최대의 치욕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 만이 아니다. 불교계 인사들을 정화위원으로 위촉해 이른바 ‘불교정화중흥회의’를 구성한 뒤 이를 통해 법난 관계자들에 대한 체탈도첩(승적을 박탈하는 것)을 진행하고 한 달 넘게 강제 참선을 강요한 것이다.

강제 참선은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흥국사에서 이뤄졌는데 30여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합수부의 감시 하에 참선과 운력(절에서 이뤄지는 농사일 등 노동)을 반복하며 40여일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법난대책위 상임대표인 법타스님은 이에 대해 “불교수행의 근간을 이루는 참선을 합수부에 의해 강요당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이는 종교가 가진 자정능력을 철저히 무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충북에서는 법주사, 구인사가 타겟
신군부의 정통성을 대놓고 부정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에 대한 보복테러의 성격을 띤 10.27법난이지만 불교계의 내분, 일부 스님들의 부정축재가 빌미를 제공했음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일본 불교를 이식하면서 대처승(부인을 거느린 승려)이 주류를 이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비구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불교계의 대립과 갈등, 폭력 문제가 싹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충북에서 법난의 타겟이 된 사찰은 우선 조계종 5교구 본사인 법주사였다. 한국의 불교를 주도하는 ‘금오문도’ 계열의 사찰인 법주사는 사찰의 규모는 물론 위상면에서도 으뜸을 차지하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당시 법주사 주지는 현재 청주 관음사 회주로 있는 이두스님으로, 이두스님을 비롯해 교무국장이었던 해운스님 등 법주사 3직(교무·재무·총무)이 법난의 화를 입었다. 또 월탄스님 등 금오문도의 간판 스님들이 법난에 연루돼 조사를 받았다.
특이한 것은 조계종 내분을 빌미로 시작된 법난임에도 충북 단양에 총본산이 있는 천태종 구인사에도 불똥이 튀었다는 것이다. 당시 천태종 총무원장이었던 석암스님은 법난으로 옥고까지 치렀고, 이를 계기로 총무원장 자리까지 내놓게 된다.

당시 검찰로 송치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제천·단양을 지역구로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영준 전 의원인데, 건강을 이유로 16대 출마포기를 선언했던 김 전 의원은 현재 강원도 영월에서 칩거생활을 하고 있어 이와 관련한 뒷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굳게 입 다문 당사자들
불교의 위상에 철저히 먹칠을 한 이 사건이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던 것은 불교계가 치욕사건으로만 규정했을 뿐 진상규명을 스스로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당시 법주사 주지였던 이두스님도 “전두환정권도 문제지만 법난은 불교계 내분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며 “그 이후로 법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답변으로 구체적인 증언을 피했다. 이두스님은 다만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혐의가 없음을 인정받았지만 주지직을 사임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당시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이에 반해 천태종 총무원장인 박석암스님은 산림과 공무원이나 세무서에 금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사법처리를 받기도 했다. 석암스님은 이를 계기로 총무원장 자리를 내놓았고 전운덕총무원장 시대가 열리게 된다.

어찌 됐든 법난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서는 당사자는 물론 목격자들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 현재 법주사 율주로 있는 혜정스님은 보안사에서도 꼿꼿한 선승의 모습을 보여 수사관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주지역의 원로스님인 태고종 보현사 원봉스님은 법난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보안사에서 일했던 관계자들로부터 혜정스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충북지역 태고종의 산증인인 연화사 주지 보안스님도 “충북지역은 법주사와 구인사에 법난이 집중됐다”며 “법난으로 연행됐던 스님 중에 일부는 옥고를 치른 뒤 나와 머리를 기른 채 생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보안스님은 또 법난에 이어진 사찰 수색과 관련해 “연화사에도 군·경이 올라와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면 소란을 피웠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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