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분기역 부강터널 봉쇄작전에서 ‘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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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분기역 부강터널 봉쇄작전에서 ‘분기’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5.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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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부각되는 6공화국 비화

호남고속철도 오송분기역이 최종 확정되자 언론은 일제히 ‘12년 과업’임을 강조했다. YS정부에 의해 호남고속철도 건설계획이 발표된 1993년을 기점으로 하면 올해가 꼭 12년째가 된다. 사실 호남고속철도 오송분기역이 충북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이 때만해도 경부고속철도 청주역(현 오송역)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호남고속철 분기역 유치로 이 문제에 확실한 방점을 찍자는 도민들의 기대감은 각별했다. 지역 사회 각계의 의견이 모아지면서 급기야 2년 후인 1995년 열혈 인사 이상록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오송분기역유치추진위원회가 공식 출범한다.

오송분기역의 원조는 경부고속철 유치
냉정하게 접근하면 오늘의 오송분기역은 훨씬 이전의 경부고속철도 유치운동이 결정적 단초가 됐다. 당초 경부고속철은 충북을 경유하지 않는 것으로 기획됐다. 정부가 직선 노선만을 고집해 서울~강남~평택~온양~대전으로 연결되는 안이 결정돼 대통령의 재가까기 거쳐 철도청이 발표한 것이다.

이 계획대로라면 경부고속철도는 지금의 오송이 아닌 조치원 서쪽 4㎞ 지점을 통과할 판이었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개발이 뒤처졌던 충북은 향후 2000년대에선 미아로 추락할 게 확실해졌다. 이래서 나온 것이 경부고속철 유치운동이다. 결국 범도민운동으로 확산된 경부고속철 유치운동이 결실을 맺음으로써 현 고속철이 조치원 서쪽이 아닌 조치원 동쪽인 충북 청원 오송을 지나게 된 것이다. 이 때 정부로부터 약속받은 것이 ‘청주권의 인구가 100만명이 될 때 경부고속철 청주역을 설치한다’는 단서조항이다.

청주역 설치는 1987년 노태우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다. 약속을 지키라는 충북쪽의 압력에 대해 정부가 역세권 개발 미흡 등 현실적 이유를 들어 이처럼 사족을 달아 면피를 한 것이다. 이는 고속철도 노선문제로 충북과 똑같이 촉각을 곤두세웠던 수원이나 김천 영천 밀양 등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속셈이기도 했다.

정종택씨의 기상천외한 발상
충북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경부고속철은 물론 호남고속철 오송분기역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충북의 결사적 노력은 노태우정부 시절의 이른바 ‘부강터널 봉쇄작전’으로 상징된다. 경부고속철 청주역 설치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87년 12월 13대 대선 때 노태우대통령의 선거공약으로 제시됐다. 청주 무심천 유세에서 발표된 5대 공약의 하나였던 것. 이렇게 되기까지는 11, 12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던 정종택씨(현 충청대학장)의 노력이 컸는데, 정종택 전의원은 청주국제공항건설과 경부고속철도 청주역 설치, 첨단과학기술단지 조성, 대청댐물 무심천 방류, 청주종합예술문화회관 건립 등 5개항을 노태우대통령 공약에 포함시키고 4개월 후에 열린 13대 총선에선 아예 자신의 공약으로 제시해 여론을 주도했다.

하지만 경부고속철도 청주역 설치가 애매모호해지자 13대에선 분과위를 교통체신위원회로 옮겨 고군분투했다. 이 때 정종택씨는 추진위 관계자들을 설득해 한가지 거사를 계획한다. 현재의 경부선 구간에 있는 청원 부강터널을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유치위 관계자들은 처음 놀랐으나 그 취지를 알아차리고 당장 행동에 들어간다. 느닷없이 부강터널 현지에 나타나 사진을 찍으며 법석을 떨자 이는 곧바로 청와대와 정부부처로 보고됐고, 긴급 대책회의까지 열리게 된다. 야당도 아닌 여당의원이 주민들을 꼬드겨 불법 시위를 벌인다는 자체가 정부로선 곤혹스러웠다. 청와대와 정부가 역으로 확인작업까지 벌였으나 이미 입을 맞춘 충북쪽의 으름장과 기세가 예사롭지 않자 이 때까지만 해도 ‘청주역 불갗로만 굳어졌던 분위기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정종택씨의 속내는 실제 결행보다는 적당한 협박이었다. 어쨌든 효과는 단단하게 나타나 얼마 후 청주역 설치, 다시 말해 경부고속철도의 충북 경유라는 낭보를 접하게 된다. 향후 역세권 인구 100만명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지루한 승부에서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다. 부강터널 협박카드(?)에 대해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충청일보 유영혁기자(고인)는 후에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이 차마 입에 담지못할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해 당시의 분위기를 실감케 했다. 충북의 거사계획은 청와대의 허를 찌른만큼 효과도 컸다.

홍재형의원, 예산확보로 결정타
이후 경부고속철 청주역(오송)은 16대 국회에 들어 홍재형의원(열린우리당)이 오송역사 부지 및 건립비를 확보함으로써 확실해졌고, 결국 이를 근거로 오늘의 호남고속철도 오송분기역이 성사되게 됐다. 결론적으로 오송분기역 유치의 일등공신은 바로 경부고속철이다.

경부고속철 유치위원장과 오송분기역유치추진위원장을 연거푸 맡아 고속철 유치운동의 큰 획을 그은 이상록씨(78)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경부고속철을 충북으로 유치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오송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이미 서울~천안~대전으로 결정된 노선을 서울~천안~오송~대전으로 변경시킨 것은 가히 혁명적 발상이었다. 충북의 저력은 사실 그 때 이미 확인됐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공주 연기에 들어섬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됐다. 행정도시의 관문은 당연히 오송처럼 오른쪽에 위치해야 정상이다. 서울의 남대문과 동대문은 있어도 서대문과 북대문은 없어지지 않았나. 마찬가지다. 당초 행정수도의 입지가 오송 서쪽의 공주 연기로 결정될 때도 나는 이런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오송분기역 확정도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 앞선 경부고속철도유치운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야 할 것이다”고 말한 그는 병상에서 오송분기역 확정소식을 듣고 눈물이 핑돌았다고 말한다. 지난해 초 대외활동에서 은퇴한 그는 5월 18일 갑작스런 사고로 척추골절상을 입고 수술 후 장기간 입원을 거쳐 지난 7월 4일 퇴원했지만 여전히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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