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를 처음 발견한 플랑시 그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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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를 처음 발견한 플랑시 그를 다시 본다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6.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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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MBC 창사특집극 ‘직지의 최초 발견자, 콜랭 드 플랑시’

직지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 흥미진진, 최초 공개 자료도 많아

   
▲ 콜랭 드 플랑시(1853~1922)
청주MBC가 또 다시 직지로 ‘뜬다’. 청주MBC는 창사 36주년을 맞아 HD특집다큐멘터리 ‘직지의 최초 발견자, 콜랭 드 플랑시’(기획 김학찬·연출 남윤성·촬영 박종성)를 제작하고 오는 31일 밤 11시 5분 시청자를 찾아간다. 이번 다큐 역시 ‘직지’로 이름을 날린 남윤성 편성제작부장 작품.

남 부장은 지난해 4월부터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이하 플랑시)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프랑스 해외취재를 다녀왔다. 플랑시는 주한 프랑스 초대 공사로 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직지 원본 하권을 가져간 사람. 올해는 마침 한불수교 120주년이 되는 해라서 중앙정부에서도 프랑스에 관한 관심이 많아 이번 다큐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플랑시, 인쇄출판업자의 아들”
이번 다큐의 주제는 플랑시가 어떻게 직지를 만났으며,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는 어떻게 이 직지를 소장하게 됐고, 플랑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등이다. 다소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었던 기존의 직지 작품에 비해 이번 다큐는 매우 흥미롭다.

청주시가 직지찾기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직지의 존재는 오리무중이고, 직지 원본을 보기 위해서는 오로지 프랑스국립도서관까지 가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플랑시라는 인물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플랑시는 청주시와 대한민국이 자랑해마지 않는 세계 최초의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직지를 프랑스로 가져간 사람인데 그에 관한 어떤 논문이나 기획물이 없었다. 따라서 이번 다큐는 그에 관한 최초의 작품이다. 때문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최초 공개 자료’도 많다.

   
▲ 파리시립고문서 보관소 관계자들과 함께한 남윤성부장(왼쪽 세번째)과
박종성부장(왼쪽 네번째).
남윤성 부장은 “플랑시의 아버지는 인쇄출판업자에다 작가였다. 플랑시는 아버지가 출판한 책을 평생 가지고 있다가 말년에 고향 트르와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적 소양과 학식이 매우 높은 외교관이었다. 조선에서 공사로 일하면서 한국의 책과 골동품, 그림, 도자기, 우주천문학자료 등을 수집해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자신의 치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플랑시는 자신의 모교인 동양어대학에 우리나라 고서 1500권을 기증하고, 그 외에도 도서관과 박물관에 책·골동품·그림·자료 등을 기증했다. 그는 조선을 가난하고 더럽고 미개한 나라로 보지 않고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나라로 이해했다. 조선을 책을 통해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직지는 그가 고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손에 넣게 된 보물”이라고 말했다.

플랑시는 1888~1891년, 1896~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한다. 그런데 그의 모교인 동양어대학에서는 각국에 파견나간 외교관들에게 그 나라의 서적을 사오도록 명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양어대학은 동양에 파견되는 통역관들을 길러내는 역할을 했고, 플랑시는 이 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했다. 이 대학의 넬리 귈롬 도서관장은 청주MBC를 통해 “플랑시가 정기적으로 많은 서적을 우리 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말해 이러한 사실을 입증했다.

남 부장은 “플랑시가 기증한 한국책은 역사, 지리, 교육분야는 물론 한글로 된 홍길동전, 흥부전같은 민간소설도 들어 있었다. 또 고종임금으로부터 선물 받은 ‘동국통감’이라는 책과 거문고의 악보를 정리해 놓은 ‘금보’라는 책도 있다. ‘금보’는 보물로 지정된 책이다. 프랑스 정부나 대학에서 책을 사오도록 플랑시에게 돈을 주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플랑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당시 책과 물건들을 샀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플랑시가 직지를 만난 것은 1896~1899년 조선에 두 번째로 부임해 와서. 그는 직지를 손에 넣고 책 표지에 “서기 1377년 한국의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라고 써 넣었다. 이 글귀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직지 마지막 장에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권하 선광칠년정사칠월 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라는 간행기가 들어 있다. 동양어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해서 한자에 능통했던 그는 선광칠년이 1377년이라는 것과 주자(鑄字)가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간파해내고 이런 글을 적은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에 한국을 알린 ‘한국서지’

   
▲ 파리만국박람회 한국관의 삽화 모습.
이때 직지가 국내외적으로 처음 선보였다.
그가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한국서지’라는 책의 출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의 책을 소개한 책이다. ‘한국서지’의 번역판을 낸 이희재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이 책은 한국에 관한 문화, 문헌뿐 아니라 정치, 경제,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기록들이 들어 있다”고 평했다. ‘한국서지’를 완성한 사람은 플랑시의 후임으로 한국에 온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이지만 이 책을 발간하자고 한 사람은 플랑시였다.

‘한국서지’는 총 4권이고 제4권은 부록 형태로 나왔는데, 직지는 바로 제4권에 소개돼 있다. 남 부장의 말이다. “한국서지에는 우리나라 책 3821종이 소개돼 있다. 한국서지는 한국의 책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당시 한국서지는 유럽인들이 한국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플랑시와 쿠랑은 수많은 한국의 도서관과 서점, 노점뿐 아니라 외국의 도서관, 학교를 방문해 우리나라 책을 조사하고 연구한 책들에 대해 해제를 달았다. 이런 과정에서 직지를 만난 것이다.

직지를 만난 것은 우연이지만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서지 3738번에서는 직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책. 대 8절판(제 2권만 있음). 이 책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적고 있다. ‘1377년 청주목외 흥덕사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됨.’ 이 내용이 정확하다면 鑄字, 즉 활자는 활자의 발명을 공적으로 삼는 태종의 命보다 26년 가량 앞서 사용된 것이다. 그 외에도 宣光7年이라고 쓴 연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宣光이라는 통치연대의 명칭은 1371년 元祖의 왕위계승을 요구하는 昭宗에 의해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플랑시는 모교인 동양어대학에 많은 책을 기증했어도 직지만은 내놓지 않았다. 그 만큼 귀중하게 여겼음을 암시한다. 플랑시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이 직지를 출품한다. 그는 한국이 이 박람회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고, 이 곳에 한국관까지 만들도록 해서 유럽사회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게 남 부장 말이다. 이는 취재과정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플랑시는 또 이 때 직지를 출품하고 ‘직지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금속활자 인쇄물이고, 금속활자 발명은 독일보다 먼저 한국에서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철저한 자료조사에서 탄생한 다큐

   
▲ 프랑스 트르와박물관에 전시된 한국 유물들. 플랑시가 기증한 것들이다.
이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그동안 수집한 물건들의 일부를 경매에 내놓았다. 여기에 직지가 포함돼 있었다. 남 부장은 파리시립고문서보관소에서 직지가 유명한 보석상인 앙리 베베르에게 180프랑(현 한국돈 60~70만원)에 팔린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는 한국책 50여권을 사면서 이 직지는 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황정하 전 고인쇄박물관 학예실장은 “도서관에서 직지의 가치를 몰랐거나 알아도 무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베베르는 죽기 전, 손자에게 직지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 때문에 직지가 오늘날 이 도서관에 전시돼 있는 것이다. 직지는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주최한 ‘책’ 특별전에 외출을 했고 이 때 전세계인들에게 공개돼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남 부장은 이 다큐를 제작하면서 플랑시가 왜 직지를 기증하지 않고 경매에 내놓았는가를 주목했다. 그는 플랑시가 죽기 11년전에 직지를 팔았는데, 그 때는 건강이 나빴거나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한참 후여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했다. 또 매우 싼 값으로 팔린 것은 당시 사람들이 직지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파리 남동쪽 플랑시 마을에 있는 플랑시의 생가를 다녀온 남 부장은 “당시 최고의 지식산업인 인쇄출판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플랑시는 책을 가까이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마을 근교 도서관과 박물관에 끝까지 간직했던 한국 책과 유물을 기증해 현재까지도 한국을 알리고 있다. 그의 생가는 다른 사람의 별장으로 쓰이고 있다. 플랑시는 우리에게 있어 한국을 유럽사회에 알린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의 책과 유물을 사가지고 가서 부를 쌓는데 이용하지 않고 도서관과 박물관에 기증한 것도 훌륭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플랑시는 1922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한국에 있을 당시 한 조선여인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흥미를 더해준다. 플랑시는 궁중무희인 조선여인과 결혼까지 했으나, 결혼생활은 짧게 끝났다.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살다 플랑시가 일본 근무를 위해 떠난 후 향수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독신으로 살았고 조선여인과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다.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현재 소설가 신경숙씨에 의해 소설화되고 있다.

남윤성 부장은 “플랑시와 ‘한국서지’를 펴낸 모리스 쿠랑을 한국학의 선구자로 보고 각각 2편으로 제작하려고 했으나, 예산문제로 플랑시에 관한 작품만 만들었다. 청주MBC는 청주시장 명의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직지 원본 촬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도서관 부관장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문 연구자들의 특별한 요구가 있을 때만 열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직지를 엄청나게 소중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중앙정부와 청주시는 이렇게 소중한 직지의 가치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재 국가차원의 직지관련 기념사업은 단 한 개도 없다”고 분개했다.

이번 다큐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최첨단 고화질 HD 프로그램으로 직지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를 전개, 앞으로 직지 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남윤성 부장은 그동안 95년 ‘직지’ 다큐를 시작으로 2000년 ‘금속활자 그 위대한 발명’ 3부작, 2004년 ‘세상을 바꾼 금속활자 그 원류를 찾아서’ 2부작을 제작하고 온갖 방송상을 휩쓸었다. 지난해 9월에는 지역방송인으로는 최고의 상인 한국방송대상 방송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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