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골프] 내일 지구가 망해도 우리는 골프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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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골프] 내일 지구가 망해도 우리는 골프를 친다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6.08.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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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만 터졌다 하면 불거지는 골프망령
이원종 전지사가 퇴임후 주변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중의 하나는 “이젠 마음껏 골프나 치라”는 것이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빈사상태의 열린우리당 지지도를 부여잡고 고군분투하다가 끝내 좌절한 한범덕 전 정무부지사에게도 요즘 똑같은 얘기가 가해진다. 한창 일할 나이에 끈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놀러나 다니라는 것같아 얼핏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변에서 이런 말을 전하는 이유는 되레 덕담(德談) 차원이다. 현직에 있을 땐 이래저래 눈치보느라 신경쓰였으니 이젠 야인이 된 만큼 마음껏 사생활을 즐기라는 취지다.

반면 5·31지방선거 당선후 현재 한껏 탄력을 받고 있는 도내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요즘 골프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부터 친다. 폭우에 이어 폭염이 계속되면서 각종 피해가 잇따르자 극도의 몸조심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골프치려면 기상청장의 결재가 나야 한다”는 한 고위직 공무원의 푸념이 현재의 분위기를 잘 시사한다. 사람에 따라선 일상적인 ‘운동’에 불과한 골프가 특정인들에겐 이처럼 극도로 민감한 대상이 된지 오래다.

지난번 집중호우때 문제의 골프가 예의 엄청난 물폭탄을 맞았다. 그동안 자연재해나 국가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부적절한 골프가 줄곧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이번처럼 민심과 정치권이 총체적으로 골프에 매달려 허우적거린 적도 없었다. 7월 20일 홍문종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 등 당직자들의 수해 골프, 7월 29일 열린우리당 김혁규의원과 당 출신 장관들의 충주 시그너스 골프회동, 이에 앞선 7월 12~17일 열린우리당 인천지역 의원들(이호웅 안영근 한광원 신학용)의 태국 파타야 골프투어가 여론의 집중 뭇매를 맞은 후 각각 당대표의 사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한나라당 경기도당 당직자들의 수해지역 골프는 곧바로 있은 7·26 재보궐 선거에서 결정적 오비를 날리게 해 승리가 예상됐던 서울 성북을을 민주당 조순형후보에게 넘기주는 결과를 가져 왔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충주, 파타야 구설수는 한나라당 수해골프로 간신히 회복 조짐을 보이던 당 지지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내 국회의원들도 요즘 골프에 아주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여야 정치권이 ‘골프와의 전쟁’을 선포한 상태라 이럴 때 괜한 실수로 시범케이스에 걸렸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기 때문이다.

한 보좌관은 “솔직히 전에는 좀 부담이 가더라도 충북 외의 다른 지역에서 라운딩을 즐겼지만 최근엔 이것도 못 하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정 골프를 쳐야 할 상황일 경우 미리 당 지도부에 유권해석까지 묻는다는데 이러는 것도 그렇고 해서 아예 무조건 조심하라고 충고한다”고 말했다.

골프에 대한 정치권의 위기감은 열린우리당 안민석의원(경기 오산)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며칠전 당 홈페이지에 ‘골프채를 버려야 산다’는 제목으로 “골프채를 모아 고물상에 팔아 넘기고 노 골프(No-Golf)를 선언하면 어떨까”라며 공개적으로 제의했다. 그는 “골프장 없는 대한민국 정치는 상상하기 어려고, 골프를 열심히 치는 정치인 일수록 대인 관계폭이 넓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에 청춘을 바쳤고 민주화 정신의 이름으로 금배지를 단 의원들이 꼭 골프정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혹서기에 오히려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골프 때문에 영하 30도의 혹한기를 겪는 현실에 대해 한 관계자는 “아이티(IT) 분야 최강국에다 각종 첨단산업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우리나라이지만 국가적 담론은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무슨 성희롱이니, 골프니 하는 하찮은 것들이 나라 전체를 일거에 흔들고 있다. 국가의 담론이나 의제가 국제경쟁시대의 정책이나 전략이 아닌, 이런 표피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한 미래조차 암담해지게 된다. 골프 한번 잘못 쳤다고 해서 국무총리의 목이 날아가는 현실을 한번 냉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앞뒤 안 가리고 기를 쓰며 골프를 치려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지금처럼 사사건건 이런 식으로 사회를 재단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국민 의식의 내적 성숙이 절실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 정치와 골프의 공통점
골프 관련 회사의 여론조사 결과이자 골퍼와 네티즌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것으로, 상호 관계를 아주 축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①한번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끊을 수 없다.
②남의 돈으로 즐기는 사람이 많다.
③양심을 외치지만 너무 자주 속임수를 쓴다.
④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끝장이다.
⑤직접 해보기 전에는 그 맛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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