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 파동이 깨우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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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수 파동이 깨우친 것
  • 한덕현
  • 승인 2021.02.2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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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신현수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표 소동이 일단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비록 업무에 복귀했지만 그의 앞날은 지금으로선 쉽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편한 소요를 일으킨만큼 이의 면책을 위해 말 그대로 특단의 각오로 직무에 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오히려 더 외풍에 시달릴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시국이 시국인만큼 김현수는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계속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 때마다 개인의 운신은 지금보다도 더 버거워진다는 것이다. 그 자격지심에 자칫 언행에 힘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뜻밖의 처지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에 앞장서라고 총장을 시켰더니 시나브로 야당의 대권주자로 부상해 요즘 잠자리가 불편할 윤석열이 반면교사다.

그러기에 신현수 논란에 대한 개인적인 바람은 그가 본인의 뜻대로 조용히 물러나고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는 것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신임한, 그 것도 오랫동안 뜻을 같이해 온 주군을 위하고 싶었다면 검찰인사에서의 패싱논란은 스스로가 막았어야 했다. 결국엔 법무부 장관이 단행한 검찰요직 인사를 대통령도 몰랐다는 식의 의혹까지 불거졌으니 이보다 더한 망신살도 없다. 사표를 내던지고 돌연 휴가를 갈 게 아니라 차라리 청와대 수석인 핵심참모로서 직을 걸고 대통령을 끝까지 설득하려 했으나 무산됐다고 하면 그의 사의는 파문이 아니라 칭송으로 도배됐을 것이다. 이번 건은 대통령과 정부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큰 내상을 안겼다. 서로가 당당하지 못하고 졸렬했다.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택해 가장 관심있게 들은 과목이 ‘조직관리’이다. 해당 교수가 얼마나 강의를 재밌게 했던지 전공보다도 더 열심히 출석했다. 유명세로 인해 한 때 정권의 부름을 받기도 했지만 공직으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교수가 툭하면 입에 올린 자칭 조직관리의 명언이 있다.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와 ‘사람은 고쳐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신의를 강조하거나 혹은 기업, 조직, 단체의 관리와 운영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유형의 시스템과 이를 이끌 각종 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한 단골 어록(?)이었는데 사실 이는 주변에서 흔히 듣는 상투적인 말이다.

한데 살아오면서 이 말이 언뜻언뜻 되새김질 될 때가 많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인다면 ‘사람은 절대로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좀체로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내성(耐性)이라는 자각을 수없이 한다. 누가 사석에서 말을 많이 하거나 열변을 토할 때는 ‘괜한 헛수고’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반으로 딱 갈린 최근의 진영 공방을 봐도 그렇다. 자칫 정치얘기를 했다간 서로 척지기 일쑤다. 말로 인해 설득되지 않으니 사람이 변할 리가 없고 그 사람을 고쳐 써봤자 잘 될 리도 없다. 카리스마가 강한 직장 상사에게 순종하는 것은 설득의 효과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비위맞추기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 가장 힘들고 마음대로 안되는 건 사람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기업하는 사람이건 직장인이건 이 것이 꼬이게 되면 삶 자체가 힘들어진다.

근자의 화제 중 하나가 <남자는 고쳐 쓰는 거 아니다>는 책과 이를 쓴 이명길 저자다. 자칭 국내 1호 연예코치라는 직함으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품격 있다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또 얼마 전에는 요즘 유행하는 ‘랜선 북토크’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남자들이 연애를 잘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해야 한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면,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게 된다”며 이 것이 연예의 최고 비법이라고 소개한다.

 

아주 평범한 얘기일 수 있지만 여기에서 남자를 ‘사람’으로 바꾸기만 하면 의미는 더욱 심오해진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실존적 주체로써 인정하고 이해하며 좋아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상대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마치 많은 사람들에게 젊은 시절 성장통을 안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를 떠올리게 한다.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모든 문제는 소유의 의지에서 비롯되기에 소유 중심의 삶에서 존재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이 것이 바로 생의 극치라고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소유와 존재의 양극 사이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물질적 탐욕의 소유양식에서 벗어나 ‘나’와 ‘객체’의 실존을 인정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는 존재양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들판에 핀 아름다운 꽃을 꺾어 화병에 꽂는 것과, 이를 그대로 두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 그는 후자를 택하면서 중앙집권을 배제하고 개인이 완전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의 원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내가 될 수는 없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사람 둘만 모여도 거기엔 반드시 이견이 있고 갈등이 생긴다. 다만 그 간극과 괴리를 줄이는 것은 상대에 대한 선제적인 이해와 배려, 정직한 소통 그리고 이를 통한 스스로의 깨우침, 교감, 감동밖에 없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이 변하고 또 고쳐 쓸 수도 있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가 아니라 내가 몰랐을 뿐이다. 때문에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그 사람으로부터만 치유된다.

신현수 파동의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의 복귀가 국민 여론을 의식한 편의적 봉합이 아닌 근본적인 성찰의 결과물이기를 바란다. 소신을 곧추세우고 인정받으려면 이에 상응하는 용기와 책임감, 투쟁도 있어야 설득력을 얻는다. 전장의 장수는 결정적일 때 수(手) 따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공직자가, 그 것도 대통령을 보좌하겠다는 사람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는 주군을 간보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에서 졸지에 상것들의 나라로 전락하기까지는 상스러운 트럼프와, 배신을 밥먹듯이 한 백악관의 상스러운 참모들에게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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