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지역에 필요한 건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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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역에 필요한 건 자존감
  • 충청리뷰
  • 승인 2021.04.0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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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와인투어·여수 미식기행 준비중, 쿠바여행에서 느낀 점 많아

 

장면 하나, 어머니가 정성껏 기른 포도가 형편없는 가격에 수매되는 것을 안타깝게 보던 아들이 있었다. 저 포도를 어떻게 하면 제값을 받고 팔아볼까, 고민하다가 와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직장 생활 틈틈이 준비해 와인 면허를 땄다. 그렇게 소박하게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고, 이런저런 실험을 계속 하는데 빚이 늘어갔다. 결혼할 때부터 고생시켰던 아내에게는 계속 ‘10년 뒤를 기대하라’며 설득했다. 그렇게 지쳐갈 무렵,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이방카 트럼프 방한 때 그가 만든 화이트 와인을 만찬주로 쓰기로 했다고. 그날이 티핑포인트가 되어 겨우 숨통을 트기 시작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 여인성 ‘여포와인’ 대표와 영동 와인투어를 개발해보기로 했다. 포도나무 아래에서 ‘와인 디너’를 도모하고 러시아식 샤슬릭을 와인 발상지 조지아 스타일로 포도나무숯에 구워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여 대표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 노력하는 모습이 아니라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도시인들에게는 더 통한다고,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그들은 곧 와인에 대해서 가르치려 들 것이라고. 그들이 좋아하는 비싼 와인도 두루 구비하고 ‘나도 너희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현대인들 서울과 다른 모습에 끌려
장면 둘, 여수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교사를 그만두고 여행사를 만든 사람이 있다. 하지수 ‘여수와’ 대표다. 하 대표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여순사건의 진실’이다. 이를 위해 여수 다크투어리즘(역사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보여주기 위해 여수를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여행도 적극적으로 구현해준다. 그것이 바로 ‘여수 미식 기행’이다. 여수항 주변의 활어/선어/건어물/패류 시장을 관광객과 둘러보고 물 좋은 해산물을 소개해준다. 여수에서 나고 자란 여수사람으로서 생각한 '여수의 맛'을 풀어낸다. 어패류에 대한 이해도 깊어 질문에 답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맨 왼쪽이 여인성 영동 ‘여포와인’ 대표
맨 왼쪽이 여인성 영동 ‘여포와인’ 대표

 

하 대표는 여수의 건어물 중 아구포와 가장 맞는 수제맥주를 골라 ‘여수와’ 브랜드로 만들어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하 대표에게 페어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 것을 권했다. 멍게를 먹을 때는 소주가 생각나고 화이트와인이나 싱글몰트와 어울릴 것 같은 해산물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술들을 다 메고 다녀야 하느냐?”는 그에게 “그 술을 다 들고 다니며 노력하는 모습보다 그 술을 가게에 맡겨둔 뒤에 필요할 때 꺼내 마시는 원숙한 모습에 사람들은 더 압도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맥주가 생각나는 건어물 시장에는 맥주를, 소주가 생각나는 패류 시장에는 소주를 마지막에는 포장마차 하나를 섭외해서 화이트와인이나 돔페르뇽과 같은 유명 샴페인을 키핑해 놓기로 했다.

장면 셋, 3박4일 99만원이라는 목표 가치를 설정하고 ‘명품 한국기행’과 ‘명품 한국스테이’를 구성하고 있다. 이 여행을 위해 강원도에서 주문진의 이윤길 선장과 덕산기 계곡의 강기희 작가를 만났다. 주문진의 이윤길 선장과 하루를 보내는 ‘해적투어’는 44만원짜리 여행으로 개발할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윤길 선장이 배를 탄지 44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44년 인생을 하루에 집약해서 듣는 여행이라면 충분히 44만원의 가치가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정선 덕산기 계곡의 강기희 작가와 하루를 보내는 ‘산적투어’ 역시 44만원으로 설정해 두었다. 덕산기 계곡의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서 이 선장과 강 작가와 함께 이 여행을 기획했다.

지금 로컬에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그리고 로컬은 자존감을 가져도 될만큼 자기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현대 도시인들은 로컬에서 압도당하기를 원한다. 맛집이라는 곳에서 줄을 서는 것보다는 “서울 사람들은 여기 오면 저걸 먹지만 여기 사람들은 이걸 먹어”라는 말에 압도되어 따라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지역에서 관광 상품을 개발할 때는 그저 노력하고 대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만 한다. 정성스럽게 준비하고도 서울보다 못할 수 있다며 조심스러워 한다. 하지만 현대 도시인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서울을 따라한 모습이 아니라 서울과 다른 모습이다.

하지수 ‘여수와’ 대표
하지수 ‘여수와’ 대표

 

자존감 강했던 쿠바 사람들
관광은 서비스업이 아니라 자존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쿠바 여행이었다. 관광을 서비스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업으로 접근해야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있다. 관광지 사람들의 자존감이 여행자의 만족감을 극대화한다. 쿠바인들은 자존감으로 꽉 차 있다. 심지어 구걸하는 사람들까지 그랬다. 거리에 구걸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지만 ‘이 좋은 쿠바에 왔는데 돈 좀 내시지’ 하는 당당한 태도였다. 보통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부유한 관광객들 앞에서 움츠러들게 마련인데 쿠바인들에게는 그런 비굴함이 전혀 없었다.

쿠바는 가난하지만 자존감이 있는 나라였다. 무엇이 자존감의 원천인지가 궁금했다. 혁명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내고 강대국과 맞선 것, 그 혁명 정부가 문화예술 교육과 체육 교육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자존감의 원천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쿠바인들은 일단, 스타일이 좋다. 그리고 피지컬이 좋다. 일종의 자기완결성이 있는 셈인데, 이 조건을 만족시키면 남 앞에서 일단 당당할 수 있다. 쿠바인들은 외형이 아니라 행위에서 자기완결성을 추구한다. 거기에서 나온 춤과 음악은 매력적이다. 그 매력이 여행자를 홀린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쿠바의 레스토랑은 대부분 음식이 별로다. 그릇도 별로고 플레이팅도 별로다. 그런데 음악에 홀려서 음식맛은 뒷전이다. 비유하자면 레스토랑에서 음악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곳에서 음식도 주는 것이다. 쿠바는 그런 곳이다. 쿠바인들은 자존감 덩어리들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쿠바인이다. 그들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그 자존감에 묻어 지낸 쿠바의 모든 순간들이 좋았다.

우리를 쿠바로 이끄는 것과 쿠바를 다녀온 뒤에 기억하는 것은 달라진다. 쿠바로 이끄는 것을 꼽아본다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 그리고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쿠바에 다녀온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쿠바를 기억하지 않는다. 모히토가 아니라 다이끼리로 아바나를 기억하듯이 말이다. 쿠바인들이 국부로 여기는 독립운동가 시인 호세 마르티의 '관타나메라',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자존감, 거리의 이름 없는 밴드들이 선물한 멋진 순간들, 이런 것들로 쿠바를 기억한다.

로컬이 가져야하는 것이 자존감이라면 로컬을 찾는 도시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겸손함이다. 그들이 쌓은 도시에서의 업적은 도시를 떠나면 무용지물이다. 간단히 표현하면 로컬로 가는 순간 그저 아저씨 아줌마일 뿐이다. 그들이 내미는 명함이 도시에서는 강철 갑옷일 수 있지만 로컬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우리가 발견해야 할 가치들이 무한히 쌓여있는 로컬에서는 그저 초보 여행자일 뿐이다. 로컬의 자존감과 도시인들의 겸손함이 함께 할 때 더 나은 여행이 가능하다.

/ 고재열 여행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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