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도시’를 통한 ‘지방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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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도시’를 통한 ‘지방 소생’
  • 충청리뷰
  • 승인 2021.05.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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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화수헌에 연 8만명, 지자체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에 주목하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저곳이 4개 섬을 통틀어서 유일한 편의점이었다.” 천사대교가 놓이면서 연륙된 신안군의 4개 섬(안좌도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을 답사할 때 안내를 맡은 신안군 공무원은 ‘4개 섬을 통틀어서’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육지와 연결되기 전에도 4개 섬끼리는 서로 연도되어 있어서 편의시설을 공유했었다.

주말이 되면 4개 섬의 아이들이 유일한 편의점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특별히 살 것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도시를 느끼고 싶어서’ 부모를 졸라 그곳에 오곤 했다고 한다. 10평 남짓한 편의점이 그들에게는 ‘4개 섬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도시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편의점은 도시를 향한 숨통이었던 셈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도시는 물 공기 흙처럼 기본 원소에 해당한다. 기성세대는 인공적인 것은 자연을 흉내 낸 것이고 자연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자연에서의 원경험이 별로 없다. 그들에게는 인공적인 환경이 자연스러운 배경이었다.

도시를 얼마나 옮겼나가 관건
처음 캠핑을 갈 때 캠핑은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캠핑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 도시로 되돌아오는 일, 도시를 (자연으로) 옮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캠핑을 가서 텐트 설치 등 피칭을 하고 바비큐를 즐기고 난 뒤 화롯불을 켜놓고 즐기는 ‘불멍’도 좋았지만 돌아와서 모든 장비를 원위치 시키고 샤워하면서 즐기는 ‘물멍’이 더 좋았다.

매번 캠핑을 갈 때마다 얼마만큼의 도시를 옮길 지를 고민했다. 추위와 바람과 비를 피하기 위한 장비를 얼마만큼 가져갈지가 늘 관건이었다. 모든 짐을 내가 메고 가야하는 백패킹을 할 때는 짐을 줄이는 것이 관건인데, 끝까지 포기 못하는 도시가 있었다. 그것은 한 잔의 드립커피일 수도 있고 한 장의 물수건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도시가 함께 할 때 비로소 안도한다.

경북 문경시 화수헌
경북 문경시 화수헌

 

일전에 지리산 산행을 할 때 후배가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람이 너무 좋다. 에어컨 바람같다." 이때 후배에게 바람의 이데아는 에어컨 바람이었다. 우리 세대는 에어컨 바람이 자연의 바람을 닮았다고 광고했지만 지금 세대에게는 언제든 내가 원하는 바람을 내어주는 에어컨 바람이 바로 바람의 이데아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에어컨 바람을 닮은 계곡의 바람이 좋은 바람인 것이고. 장범준의 노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기를 느낀거야>라는 곡의 제목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에게는 자연만큼 도시도 중요하다. 도시 또한 기본값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에 자연을 끌고 오는 것만 아니라, 어떻게 자연으로 도시를 옮기느냐도 중요한 게임이다. 자연으로 도시를 옮기는 것의 전범을 보여준 작품이 김태리가 주연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다. 전원생활의 잔잔한 매력을 보여준 이 작품이 유의미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요즘 세대가 어떻게 전원에 도시를 구현하고 싶어하는지를 대변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청년세대의 자연주의 취향으로 해석하는데 착각 혹은 착시라고 본다. <리틀 포레스트>의 방점은 도시에 있었다. 자연에 얼마나 다가갔느냐가 아니라, 도시를 얼마나 옮겼느냐가 관건이었다. 도시를 효과적으로 옮겼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드웨어는 시골이지만 소프트웨어는 도시였다. 시골에서 얼마나 도회적인 것이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자연주의 열풍만 읽는다면 착각 혹은 착시다. <리틀 포레스트>는 가장 자연주의적인 사람이 아니라 가장 도회적인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문명의 경지다. 이야기를 확장하면, 여기에 지역 관광개발의 답이 있다고 본다. 도시에 대한 열등감만 가질 것이 아니라 ‘최소 도시’를 어떻게 옮길지를 고민해야 한다. 자연이 주는 것과 인간이 달성한 것의 절묘한 조합을 고민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밭뿐인 문경 화수헌에 연간 방문객이 8만명이나 몰린 비결도 ‘최소 도시’에서 찾을 수 있다.

지자체여, 방법이 있다
화수헌을 지자체가 관광 개발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마 많은 투자를 해서 그럴듯한 한옥 시설로 탈바꿈 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도원우 대표와 리플레이스팀은 리서치에 주목했다. 그리고 뺄셈의 미학으로 접근했다. 화수헌의 역사성을 살리면서 최소한의 것만 남겼고 문경을 한 잔에 담아낼 수 있는 메뉴를 고민했다. 그리고 ‘한옥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는 절묘한 한 순간’을 작은 소반 위에 연출했다. 훌륭한 큐레이션이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 전국에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청춘들이 이미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로컬 크리에이터’라 불리는 그들이 많은 답을 내놓았다. 나는 이들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신브나로드’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장점을 응축해서 지역에 구현한다.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최소 도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지방 소멸’ 시대에 ‘지방 소생’을 시키고 있지만 지자체는 무심하다. ‘청년몰 사업’이라는 판박이 사업 말고는 이들을 활용할 틀을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대형 관광시설을 만들고 홍보하는데 열을 올리느라 그들이 만드는 조용한 혁명에 무심하다. 출렁다리 케이블카 모노레일 등의 시설을 설치하는 비용의 수십 분의 1만 투자해도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만 주목하지 않는다.

여행을 기획하면서 이런 로컬 크리에이터들을 활용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그들이 선물하는 도회적인 한 순간이 여행자들에게는 휴식이 된다. 휴식을 위해 자연에 왔지만 여행자들도 지친다. 그럴 때 이들이 숨을 틈을, 숨 쉴 여유를 준다. 에어컨 바람같은 계곡의 바람이 되어준다. 지자체도 이들에게 주목하길 바란다.

/ 고재열 여행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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