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문명의 사이 섬_고재열 여행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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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문명의 사이 섬_고재열 여행감독
  • 충청리뷰
  • 승인 2021.06.0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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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람,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가장 많이 다니는 사람. 국내며 해외 곳곳을 꿰고 있는 사람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일까. 고재열 여행감독을 만났다. 그는 시사IN 발행인이자 기자라는 직함을 벗고, 국내 최초 ‘여행감독’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여행도 영화처럼 어떤 의도를 담아 연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이제 막 육지에 도착한 그는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섬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당신은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오지를 많이 다녀요. 지나치는 사람은 자연 그대로가 좋다고 해요. 하지만 그 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은 여러 가지 놓인 상황이 다르잖아요. 이를테면 무인도를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실제로는 물이 중요해요.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잖아요. 무인도를 알면 알수록 필요한 게 많아져요. 무인도에서 비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우비를, 독충을 본 사람은 치료제를 가져가겠죠. 돌문어를 본 사람은 무엇을 가져갈까요? 초고추장? 그러면 초고추장만 있으면 될까? 다음엔 소주 생각이 나죠. 무인도에 비우러 가야겠다고 생각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할수록 필요한 게 많아져요. 문명이 과잉이기 쉽죠. 자연에 인간이 다가가면 그런 역설이 생겨요. 문명의 역설인거죠.

자연 그대로 좋은데, 밤에 모기가 많아요. 흡혈모기야. 밤새 한 숨도 못자요. 그럼 그게 유토피아일까, 나한테 지금 모기 지옥인데. 헤테로토피아의 기준은 늘 자기 자신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유토피아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건 사람들이 도시를 옮기는 걸 고민하더라고요. 자세히 보면 ‘이 사람이 옮긴 최소도시가 무엇일까’가 보여요. 누구에게는 그게 드립커피일 수 있고, 와인 잔일 수 있어요. 자연 속에서 극한의 쾌락을 느끼게 하는 건 도시적 요소인 거죠. 자연과 문명의 균형 잡기, 그게 헤테로토피아를 가르는 지점이지 않을까요.

고 감독의 ‘무인도에 가져갈 세 가지’
저의 세 가지는 공유템이에요. 저는 감독이고, 그래서 나만 즐길 수가 없어요. 첫 번째는 차. 찻잎과 물만 있으면 여럿이 마실 수 있잖아요. 두 번째는 블루투스 스피커. 소리가 공간을 디자인해요. 어떤 음악을 틀어놓느냐에 따라서 공간의 온도가 달라지잖아요. 마찬가지로 무인도의 결을 바꿔주는 건 블루투스 스피커죠. 세 번째는 나의 소중한 폰. 기억을 남겨 주고, 그 순간을 계속 재생시켜 주잖아요.

고재열 여행감독국화도
고재열 여행감독

 

유인도 프로젝트
무인도에 책 캐리어를 두고 왔어요. 책 캐리어는 말 그대로 책이 든 캐리어에요. 보지 않는 책을 사용하지 않는 캐리어에 담아 책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캐리어 도서관을 곳곳에 만들고 있어요. 책 캐리어를 통해 무인도가 유인도로 변하는 거죠. 책 캐리어가 사람을 유인하는 거예요. 사실 전에 섬에 갔을 때 캐리어를 하나 주웠어요. 열어보니 라면이랑 냄비랑 있는 거예요. 아마도 낚시꾼이 다음에 오면 먹으려고 남겨 둔 거겠죠. (그럼 주운 것이 아니고 훔친 것?) 아, 근데 주운 거예요. 왜나면 라면의 유통기한이 6개월 이상 지났거든요. 하하. 그걸 집에 가져와서 끓여먹었어요. 라면은 유통기한이 지나도 먹을 수 있잖아요. 대신 다음에 갈 때 보답 차원에서 캐리어에 책을 담아 가져갔어요. ‘부엌을 훔쳤으니, 거실을 만들어주겠다’ 한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인도를 유인도로, 예술도로 바꾸고 있어요.

섬, 여행의 블루오션
우리나라처럼 단체여행이 흥한 데가 없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죠. 그런데 수학여행으로 깨지고, 선거법으로 깨지고. 1980-1990년대 유행했던 개발독재시대의 관광지들은 모두 초토화됐어요. 섬은 일로써 좋아하기엔 비효율적인 공간이에요. 부족하거나 비싸거나 불편해요. 그래도 매력적인 장소예요. ‘도시인을 위한 자발적 유배’가 가능하죠. 단절감, 고립감. 섬이 다 해요. 그런데 역설적이게 삶의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게 섬 여행의 테마예요. 단절과 고립의 장소지만 그 섬에 우리 밖에 없고, 모닥불을 피워놨는데 어떻게 안 친해져요. 도시에서는 모두 갑옷을 입고 있잖아요.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갑옷이 벗겨져요. 사람들은 자기의 생존력을 믿지 못하니까 친절해지고 연대가 생겨요. 섬은 여행력이 만들어지는 최적의 장소지요."

새우잡이 배에 끌려간다던 섬 낙월도. 모래갯벌에서 발가락으로 백합을 캐는 송이도. 소를 방목해서 키우는 안마도. 가장 늦게 봄이 오는 소청도, 수묵화에 가까운 신안의 섬들, 육지에 눈이 와도 늦가을을 느낄 수 있는 남해의 연안섬. 이 섬은 이래서 좋고, 저 섬은 저래서 좋다는 여행감독에게 기어코 받아낸 섬 리스트다. 늘 가고 싶은 섬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여행감독의 섬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섬 풍경이 선하다.

국화도
국화도

 

섬은 헤테로토피아를 닮았다. 문명과 자연 사이, 일상과 일탈 사이, 바다와 산 사이, 그 곳에 섬이 있다. 갑옷을 벗고 본연의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들과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차를 마시고, 밤이면 모닥불을 바라보며 더 친절해진 나를 발견하는 일. 그곳이라면 누구에게나 헤테로토피아가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소망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헤테로토피아에 초대되기를. 그래서 더 많은 섬 이야기가 회자되기를. 그가 체력을 소진하지 않기를, 다음 여행의 힘을 비축하고 있기를.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온 그로부터 새로운 헤테로토피아를 만날 수 있길 말이다.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주무관·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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