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발’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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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발’을 기다리며
  • 충청리뷰
  • 승인 2021.07.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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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주 작가의 『소생기』 중 「산책자들」 주인공,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다비드 브르통은 <걷기 예찬>에서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며 “어떤 감각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든 감각의 경험”으로 정의했다. 그래서인지 걷기는 과거부터 시인, 소설가, 작곡가, 철학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수많은 걷기의 달인들이 있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스스로를 ‘직업적 산책가’라고 불렀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발터 벤야민의 파리 산책을 통한 사유의 결과물이고,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경성 산책의 경험을 공유한다. 걷기는 작가에게 관찰의, 작곡가에게 리듬의. 철학가에게 사색의 통로가 된다.

여기 또 다른 걷기의 달인이 있다

윤이주 작가의『소생기』
윤이주 작가의『소생기』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커다란 발’이라 부른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잘’ 알지 못하는 커다란 발 씨는 윤이주 작가의 『소생기』 대표 작품인 「산책자들」의 주인공이다. 소로우처럼 그도 직업적 산책가다. 소로우와 벤야민이 그랬듯 산책은 개인적인 일이기 마련이지만, 커다란 발 씨의 산책은 그의 신체를 벗어나 외부를 향한다. 그는 육거리시장 주변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모습으로 걷는다. 걷는 동안 관찰과 사색을 넘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어주고, 말없이 돕는다. 청소차 인부들이 쓰레기 싣는 것을 도와주고, 길 건너는 할머니의 뒤를 따르며, 빈집 마당을 꾹꾹 밟아준다.

그의 산책은 동네의 빈 곳과 외로운 사람들을 이어주는 의식이 된다. 그래서이다. 커다란 발 씨의 ‘걷기’ 앞에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나‘어떤 감각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든 감각의 경험’과 같은 수식어는 한없이 거추장스러우며, 시나 음악이 되지 못한 커다란 발 씨의 걷기가 내겐 어떤 시나 음악보다 위대하다.

소설의 외부효과
커다란 발 씨는 소설의 인물이지만, 그가 걷는 길은 실재의 장소다. 청주시 상당구 남주동 일원이 그대로 소설에 옮겨졌다. 윤이주 작가의 공간 ‘북클럽 체홉’에 갈 때면 소설에서처럼 ‘등나무슈퍼’에 들러 맥주를 사고, ‘로렌드 치킨’을 안주로 먹었다. 페르시안캣츠라는 요상한 이름의 세탁소, 팡팡노래방, 공원장여관 등 수많은 소설 속 간판을 우리는 실제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 속 장소를 따라 걷는 일 자체가 청주시 원도심 여행의 경로가 된다. 청주시 공무원으로서 나는 이 소설이 유명해지고 ‘커다란 발 씨와 함께 걷기’와 같은 행사들이 만들어져 청주시 도심 관광이 활성화되기를 소설 속 ‘정원’처럼 바란다.

도시 기록자들
남주동에는 여전히 농자재 점포, 묘목가게, 자전거포가 있다. 그리고 “시장으로 통하는 길이 스무 개가 넘는” 그 곳은 “넓든 좁든 어느 길로 접어들더라도” 미처 다 보지 못한 물건들과 오래된 상점이 있다. 그리고 조금만 나서면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천변 둑길이 있다. 앞이 툭 트인 천변을 걸으면 “복대기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비록 이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도 고향처럼 느끼게 된다.

청주시 남주동 풍경
청주시 남주동 풍경

 

낡은 동네지만 오래전 공간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 곳에 갈 때면 미래 세대에 남겨 주면 좋지 않을까, 자주 생각했다. 전주, 군산, 경주처럼 한때는 달랐지만 재생이란 이름으로 지금은 같아진 모습 말고, 미래세대에게 힙한 장소로 재생될 수 있도록 그들의 가치와 그들의 시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도시에 남겨놓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고풍스런 웨딩숍이 이어진 길이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낡은 2층 건물이었다. 덩치가 주변 건물에 비해 턱도 없이 작지만 미처 철거하지 못한 이 건물의 간판도 웨딩숍이다. 이 건물 2층에 만화방이 있었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은 폭이 좁고 가팔랐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천국이 거기였다.”

커다란 발 씨가 몸소 체득한 장소의 역사다. 한때 만화방이었던 2층짜리 건물은 용도를 잃고도 여전히 그 곳에 남아 1980년대 남주동의 장소감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2006년 지정됐던 도시환경정비구역은 2015년 해제되었으나, 최근 완화된 법의 틈새로 가로주택정비사업이 들어서고 있다. 사업명은 다르지만, 사업의 목적은 동일하다. 아파트 건설이라는 오래된 욕망의 전차다.

“자유극장 자리는 이제 자유노래방이 되었고”, COVID-19로 인해 자유노래방은 폐쇄되었다. 그 사이 ‘북클럽 체홉’도 남주동을 떠났다. 아파트가 빼곡한 남주동에서 커다란 발 씨는 예의 그 상냥한 보폭과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제 이곳의 변화는 누구를 통과하여 무엇으로 쓰여질 수 있을까.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주무관·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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