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민들 ‘어윤희 선생’을 기리고 닮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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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민들 ‘어윤희 선생’을 기리고 닮자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1.12.0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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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혈단신, 여성독립운동 ‘선각자’…소태면 출신, 보육사업에도 헌신
여성독립운동가 고 어윤희 선생의 옥중 사진(좌) 및 동상 모습. /국가보훈처 사진자료 및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충청리뷰_김천수 기자] 혈혈단신 여성으로 3.1독립운동에 앞장서다 2년 여 옥고를 치른 충주 출신의 대표적 여성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은 유족이 한 명도 없다. 1961년 11월 18일 별세한 뒤 서울에서 화장된 유해는 한강물에 뿌려졌다.

지난 11월 26일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지회장 윤경로)는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490-1번지 일원 조기암 마을 경로당 옆에서 독립유공자 추모비 건립 제막식을 거행했다. 바로 어윤희, 홍승로 애국지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 건립 행사였다. 이날 제막식은 조기암 마을주민들과 광복회원 및 조길형 충주시장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추모비 건립은 조기암 마을 이장 및 노인회장 등 마을 주민들 뜻이 모여 부지를 기증하는 등 적극적인 건의로 충주시 지원으로 가능했다.

특별히 혈육 한 점 없는 고 어윤희 선생에 대한 충주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1961년 11월 22과 23일 이틀 연속 경향신문에는 ‘이 여성을 보라, 어윤희 여사의 별세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유달영 선생의 칼럼이 게재됐다. 유달영은 서울농대 교수이면서 대표적 지식인이며 독립유공자로 어윤희 선생과 인연도 있다. 그의 칼럼을 축약해 숙독해 본다.

19일 새벽에 어윤희 여사가 85세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나는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한국 여성사에 있어서 어 여사처럼 철저하게 나라를 위해서 고통을 달게 받고 또 기나긴 일생을 한결같이 어려운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분투한 사람은 찾아내기 드물 것이다. 나는 곧 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민족이 어 여사를 성심을 다하여 영결하도록 하자고 권하였다. 예정된 4h클랍 전국경진대회 등 행사 관계로 오후에야 겨우 그가 별세한 마포서강 경찰지서 옆 유인보육원으로 달려갔다.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

3.1운동당시 어 여사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부터 친남매처럼 서로 아껴오던 스코필드박사가 막 다녀간 뒤였다. 시체 옆에는 국화 화환이 외로이 놓여있고 일제시대부터 평생을 부모 잃은 어린이를 위해서 동지로 일해 온 오기환, 한철호 두 선생이 노구를 무릅쓰고 장례준비에 바빴다. 교회 관계의 목사 장로 몇 분이 모여 장례를 위해서 상의하는 중이었고 어 여사의 손에 길러 오던 아이들은 보기에도 한층 처연하였다.

어 여사는 일편단심 이민족을 위해서 팔십평생을 바친이다. 85년 전 충주에서 한 농민의 무남 독녀로 태어난 어 여사는 어렸을 때에 이웃집 색씨를 찾아가 물레질을 해주면서 국문을 배웠고 다시 아버지에게 한문을 익혀서 대학까지 배웠다. 그의 청년시설부터 좌우명은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이란 여섯글자였다고 한다. 좌우명 그대로 말은 충성되고 믿부게 하며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기에 노력하였다.

어 여사는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8세 때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16세에는 남편이 동학 의병으로 나가 전사하였다. 여사는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아래 혈혈단신이 되었다. 여사가 사회의 모진파란 속에 휩쓸려 고생 많은 청춘을 보낸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가 32세 때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34 세에 개성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하여 비로소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43세 때에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서울로부터 맡아다가 개성지국에 뿌리고 스스로 선두에서 서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에 잡히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영어의 생활을 했다. 일본 경찰에게 어여사가 겪은 심한 고문과 모욕은 당시의 일본 경찰의 잔인성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유관순과 옥중 만세운동도

특히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옥중에서의 일화의 하나는 어 여사가 우리 민족의 영원한 꽃인 유관순 양과 같은 감방에 있었다. 어 여사는 이 민족의 독립과 수다한 애국자들의 분투를 위해 금식기도를 할 때마다 자기 몫의 밥을 유 양에게 먹이었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에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는 것이다. 유 양이 무서운 고문 끝에 옥사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그 당시에 이 불굴 정신의 애국여성들의 얼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느낄 것이다.

어 여사는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투사들에게 돈을 모아주는 일, 그들을 안전하게 숨겨주는 일, 무기를 맡아 보관 하는 일, 국내 해외와의 연락하는 일을 수다한 위험을 부릅쓰고 했다. 어느 때는 자기 집에 해외에서 들어온 광복투사를 숨겨 둔 그 찰나에 형사들이 수색을 하며 쫓아왔었으나 너무도 태연하게 대해서 그들을 돌려보낸 아슬아슬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여러차례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였으나 그때마다 당당하게 민족애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일인들조차 경탄케 했었다.

노후에는 부모 없는 어린 고아들을 데려다가 천신만고 기르기에 온 성의를 다했다. 나는 개성에서 교편을 잡고 살던 10년 동안에 어 여사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아낌을 많이 받았다. 일정 말엽에 호수돈 여학교에서 일경에 의해서 쫓겨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놓여나왔을 때에 먼저 찾아와 위로해 준 분이다.

오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에 가득한 것은 불굴의 정의와 따뜻한 사랑 뿐인 듯하다. 그의 일생을 어렴풋이라도 더듬어보라.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청상과부가 되고 단 하나의 혈육도 없는 내버려진 푸른 하늘아래 고아인 어윤희 여사를 어렴풋이라도 더듬어보라.

골분, 유언으로 한강 물에

그 완고한 사회에서 34세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배우는 그 학구의 정신과 3.1운동 때에 정의된 뜨거운 민족애와 부모 잃은 어린이와 외뢰운 섬 사람들을 두루 찾아 신앙의 씨를 뿌린 일관한 생애를 보라. 그 불우한 자신의 일생을 한번도 스스로 탄식해 본 일이 없는 투철한 인생관을 보라.

특히 한국의 여성들은 이 위대한 선배를 보라. 한국여성들이 어 여사를 거울삼아 걸어간다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 어 여사의 생애는 태양처럼 찬란하겠으나 그의 죽음은 일그러진 고아원 마루에 너무도 적막하고 초라하다. 어 여사의 유언에 따라 그 유해가 화장으로 한 줌 재가 되어 한강에 뿌려지는 것으로 그의 생애가 마지막이라면 이민족의 역사에서 희망의 신은 영원히 작별한 것으로 나는 믿고 두려워한다. 참 사람을 존경하고 대접할 줄 모르는 민족은 흥하지 못한다.

18세 때까지 충주에서 살다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서 평생을 3.1운동과 보육사업에 헌신한 어윤희 선생의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여성사전시관, 독립유공자유족회,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등이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고 체계적이지 않고 기록의 차이도 보인다.

충주지역이 앞장서 기록을 체계화하고 그를 기리며 그의 정신이 지역 사회운동에 반영돼 번지길 기대한다. 어윤희 선생은 3.1운동과 함께 개성지역 신간회 및 근우회 간사 등으로 단체 출범의 주역을 맡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보육 사회사업에 헌신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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