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 100년만에 부활하다
상태바
신규식, 100년만에 부활하다
  • 한덕현
  • 승인 2022.03.03 09: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운동가 예관 신규식 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추모사업이 불붙는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지난 3.1절을 맞아 지역사회의 뜻있는 이들이 가칭 예관 신규식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것이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의 대가인 박걸순 충북대 교수가 맡았고 학계, 시민단체, 언론계, 정계 인사 15명이 위원으로 참여해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신규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업적을 남겼는데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올 김용옥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며 그 단초가 신규식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다. 그는 신규식이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모든 물줄기를 이루는 거인이었는데도 광복 초기 이승만의 친일 사관에 뭉개져버리는 바람에 지금까지 묻혀졌다고 일갈했다. 지난해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장군이 서거 78년만에 고국으로 봉환될 때도 신규식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일각에서 제기돼 큰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가 중앙 차원이 아닌 지방에서 재조명 된다는 점이 우선 이채롭다.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라는 연고성을 감안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움직임은 처음 일부 후손들에 의해 시작되어 지금은 지역사회의 운동차원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언론인 출신으로 청주삼겹살거리를 명소로 만든 김동진 청주서문시장상인회 회장이 소식을 듣고 동참한 것이 기념사업회 결성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그는 기념사업회 구성을 주도하고 아예 사무처장으로 실무를 맡아 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오는 925일이 신규식 순국 100주년이 되고 이에 앞선 7월은 예관이 출범시켜 독립운동의 총체적 산실이 된 동제사(同濟社) 설립 110주년이 된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3월 중 유적지 답사에 이어 411일 상해임시정부 출범일에 맞춰 첫 기념사업으로 추모사업의 닻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신규식은 그의 아호 예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예관 은 말 그대로 곁눈질로 흘겨본다는 뜻으로 여기엔 반일에 대한 신규식의 신념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는 대한제국 무관으로 재직중이던 1905년 나라가 을사늑약을 당하자 이에 대한 항거로 의병을 일으키려다 좌절한다. 비분강개를 삭이지 못하던 그는 결국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실패했고 이 때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게 된다.

 

예관 신규식 선생과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회 결성 장면
예관 신규식 선생과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회 결성 장면

 

상해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나서는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세상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겠냐며 일본놈을 대할 때마다 꼬나보면서 독립광명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가 늘 짙은 색안경을 끼고 대중앞에 나타난 이유다. 마치 일제에 굽히기 싫어 세수할 때도 꼿꼿이 서서 얼굴을 닦았다는 단재 신채호를 연상시킨다.

신규식과 신채호는 같은 고향인 고령 신()씨 집안의 아저씨와 조카 관계다. 신규식은 그가 그토록 공들인 임시정부가 분열과 내분으로 갈팡질팡하자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로서 단식을 강행하며 각성을 촉구하다 43세 젊은 나이로 순국한다.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누워서도 한인들의 분열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먹지 않고, 말하지 않고, 약도 거부하다가 1922925일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치되었다가 뒤늦게서야 1993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신규식이 1912년 설립한 동제사는 비밀결사체로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러시아, 일본 등에도 지부를 둘 정도로 방대한 국제적 조직이었다. 동제사는 당시 독립운동의 최고 산실이었고 신규식 독립운동의 모든 걸 대표한다고 봐야 한다. 최고 전성기엔 회원이 300여명에 달했던 동제사를 중심으로 191312월 상하이에 설립된 박달학원(博達學院)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확대와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교수진 신규식을 비롯한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조성환 등 면면이 이를 입증하고 남는다.

이 역시 우리나라 역사교육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제사가 19177월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문이다. 이 것이 곧 2년후 3.1독립선언서의 모체가 된다. 1919411일 설립된 상해임시정부도 동제사와, 동제사를 인연으로 하는 중국 거목들의 도움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다. 이 것만 보더라도 임시정부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김구나 이승만 뿐만 아니라 신규식도 해당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초창기 김구와 이승만의 활동에 뒷받침이 되어준 것도 동제사이다. 동제사는 멸망한 조선을 대신해 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 명실상부한 국가의 역할을 했다.

독립을 위한 것이라면 궂은 일을 마다않으면서도 생전에 공명과는 거리를 멀리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신규식이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건 당장 고향인 충북지역의 사정만 봐도 그렇다. 단재 신채호에 대해선 거도적인 추념사업이 정착되어 있지만 신규식은 이름조차 쉽게 거론되지 않는 실정이다. 동 시대에, 같은 가문에서 태어나 서로 의기를 나누며 활동했는데도 대접은 이렇게 다르다. 김용옥의 지적대로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다투던 분열주의자들, 여기에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작용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신규식은 고령 신씨 문중과 함께 고향 인차리등에 문동학원(1901)을 비롯해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춘 덕남사숙(德南私塾,1903), 산동학원(1904), 청동학교(1907, 청주) 등을 설립해 후세를 위한 교육사업에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주춧돌을 놓았다. 때문에 그에 대한 재평가는 교육도시의 효시라는 청주가 비로소 정체성을 확립하는 특단의 계기가 된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기념사업회 활동에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충북도는 추경을 통해 4000만원 예산지원을 결정했고 청주시도 조만간 나설 것으로 알려져 예관 신규식 선생의 재탄생이 현실화 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