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전라도 연가(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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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격외도리] 전라도 연가(戀歌)
  • 한덕현 발행인
  • 승인 2022.03.1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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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보다는 전라도라는 말을 좋아한다. 살갑기도 하고 어휘의 찰진 맛이 더 느껴져서다. 주말산행을 즐기는 나로선 봄이 시작됨과 동시에 가장 먼저 찾고 싶은 곳이 전라도 남해안이다. 매년 그곳에서 꽃맞이를 하는 게 버릇이 됐다. 봄의 전령 동백꽃의 완도는 이미 다녀왔고 조만간 진달래가 만개할 여수 영취산을 오를 생각에 그저 마음이 설렌다. 그야말로 온 산이 붉게 물드는 장관은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거추장스럽다.

이번에도 전라도는 민주당에 몰표를 던졌다. 이재명에게 84.6%라는 압도적인 표를 안긴 것이다. 그러자 많은 언론들이 전라도의 일방통행을 지적하면서 조심스럽게 지역감정의 재연이라는 우려까지 숨기지 않았다. 시중의 여론 역시 전라도에서 보수 후보가 역대 최고 득표를 기록한 사실이 사족으로 달리면서도 “전라도는 역시 전라도”라는 평가가 대세였다. 듣기에 따라선 폄훼로도 받아들여졌고 반대로 아무도 못하는 일을 전라도는 해낸다는 치사로도 해석됐다.

냉정히 말하면 이번 전라도 표심은 ‘예상대로’가 아니라 ‘예상외’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같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국민의힘이 공을 들인 것만 봐도 그렇다.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전라도의 외딴 섬까지 찾아가 유세를 하고 사전투표도 전략적으로 광주에서 한 이준석은 30% 득표까지 자신했다. 당내 여론 또한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도 20% 대는 가능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으로 넘쳐났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여론조사 수치다. 이재명의 전라도 지지도는 막판까지 60, 70% 대를 맴돌았고 심지어 50% 이내로도 조사된 적이 있다. 아무리 후보가 비호감이고 전라도의 적자 이낙연의 좌절에 따른 상실감이 컸다 하더라도 이 정도가 되면 국민의힘으로선 욕심을 부려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론은 윤석열이 간신히 10% 초반의 두 자리수를 기록하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역시 전라도는 못말려”를 되뇌었다. 이 곳 표심을 무조건적이라고 냉소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라도의 민심은 이처럼 무모할 정도로 단세포적일까.

 

국립 518민주묘지 전경. /사진=국가보훈처
국립 518민주묘지 전경. /사진=국가보훈처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특단의 계기가 다름아닌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다. 박근혜 탄핵 후 문재인이 ‘운명’이라는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전국 득표율은 41.1%였다. 이 때 2위 홍준표의 24%보다 더 눈길을 끈 건 3위로 낙선한 안철수의 21.4%라는 득표였다. 이를 견인한 것이 전라도의 민심이었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진보의 텃밭이라는, 그리하여 더불어민주당이 전라도의 대선판을 지배할 것같은 상황에서도 이 곳에서 전국 득표율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다. 광주 30.08%, 전남 30.68%, 전북 23.76%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안철수는 때묻지 않고 정직한, 실력있는 참신한 후보로 이미지가 각인된 터라 전라도에서의 이런 지지세는 결과적으로 호남 표심의 정수를 보여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특정 정치이념이나 성향에 맹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하는 대통령의 가능성을 향해 합리, 이성의 판단을 한다는 것을 실체적 사실로써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주목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재명이 전라도에서 표를 휩쓸어가는 와중에도 윤석열은 역대 대선의 보수 후보중 최고 득표를 기록했다. 광주 12.7%, 전남 11.44%, 전북 14.42%는 겨우 한 자리수에 만족하던 이전의 보수 후보들이 꿈도 못꾸던, 말 그대로 이상향의 수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재명과의 0.73%, 24만7077표 차이 승리는 전라도가 만들어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이 기대했던 만큼 표가 안 나오고 막판 이재명으로 몰표가 쏠린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윤석열의 인격이 의심스러웠을 수도 있고 그 가족의 추문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고 향후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 미덥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이를 애써 간과한다면... 글쎄다, 전라도의 다음번 표심은 안 봐도 선하다.

전라도의 정서는 이렇다. 화끈하면서도 거기엔 분명한 명분이 있다. 한번 맺은 신의는 쉽게 버리지 않는다. 이번 투표에서도 확인됐듯이 무한히 고민하면서도 끝내는 믿음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전라도의 집단지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동안 역사적인 고비마다 그 중심에 서서 정의를 부르짖고, 포악한 희생을 당하면서도 전라도는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남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유난히 붉은 색의 황토, 그리고 밋밋한 지형이지만 주변을 압도하는 광주 5.18민주묘지의 분위기도 이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대선이 끝난 후 어쩔 수 없이 다시 충북을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듣기에 역겨운 클리셰가 예외없이 또 언론을 장식했다. 역대 대선의 캐스팅 보트, 바로미터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적중했다고 호들갑이다. 윤석열이 이재명을 조금 앞섰다고 해서 충북이 캐스팅 보트였다면 윤석열이 근소하게 표를 더 받은 전국의 모든 곳은 똑같은 입장이 된다. 충북만의 같잖은 마스터베이션은 이젠 끝낼 때가 됐다.

이를 들으면서 불편하기 그지 없던 차에 나경원과 이혜훈의 충북지사 출마설이 전해졌다. 나경원은 부친이 영동출신이고 이혜훈은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제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것이 충북 연고라고 한다. 이혜훈은 본인이 직접 지역언론에 보도자료까지 내며 도지사 출마를 공언했다. 충북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이럴까 하는 자괴감이 엄습한다. 자존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을 유린당하는 기분이다.

지인들에게 “차라리 전라도로 가서 살아라”고 핀잔을 들을 정도로 나는 전라도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이다. 고등학교 단짝은 광주출신이었고 그가 목표했던 서울대에 실패해 충격을 받고 쓰러져 한달여간 입원했을 땐 꼬박 간병을 자처했다. 좋아하는 등산과 골프 행선지를 고민할 때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지역이 전라도다. 당장 맛깔스런 음식이 내 입맛에 딱 맞고 무엇보다도 그 곳의 자연과 운치, 느낌들이 마음에 든다. 전라도 하면 ‘따블백’으로 폄하되던 시절, 내무반이 온통 전라도 장병이라 어쩔 수없이 그 곳 사투리를 쓰면서 3년이나 고락을 같이한 인연도 있다.

한 번은 고향 목포로 휴가가는 부하에게 농담삼아 “올 때 세발낙지나 가져와라”고 했다가 그가 귀대하는 날 낙지가 가득 찬 양동이를 건네받고 고민하다 내무반 전체 요원을 침상에 일렬로 세워 산낙지를 입에 물린채 야간점호를 강행한, 대한민국 군대에서 유일무이한 추억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런 전라도가 좋다. 그들의 심성과 근성이 부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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