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대통령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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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대통령 시대
  • 한덕현 발행인
  • 승인 2022.04.0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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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어쩌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제도와 법이 허용하는 한, 소신대로 대통령 노릇 하고 물러가면 된다.”

대표적 보수논객이라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윤석열 당선인에 대해 쓴 칼럼 내용이다. 그야말로 어? 하다가 대통령이 된 마당에 쓰리고 아릴 것 없으니 ‘윤석열다운 정치’를 한번 맘껏 펼치라고 주문한 것이다. 당선인이 듣기엔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뼈속까지 검찰주의자로 살다가 참으로 우연하게도 대통령까지 하게 됐다.

남들은 평생을 정치판에서 굴러도 대통령은 커녕 후보에조차 거론되기가 어려운 판에 그는 단 몇 개월만에 이렇게 변신했다. 그래서일까, 물론 그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시중에선 윤 당선인을 아직 대통령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인색하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5년 후에나 판단하겠다는 이들도 넘쳐난다.

바야흐로 어쩌다 세상이 됐다. 요즘 뜨고 있는 예능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어쩌다 사장’, ‘어쩌다 fc’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어떤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중도 탈락한 참가자가 결선 진출자 한 명이 과거 갑질로 자격을 박탈당하자 엉겁결에 대타로 나서 1위를 하는 바람에 최고 스타가 됐다. 아무리 어쩌다를 곱씹어도 이보다 더한 인생 반전은 없다.
 

윤석열 당선인
윤석열 당선인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뉴시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뉴시스

 

우리나라 뿐 아니다. 미국에선 어쩌다가 대통령이 되었다가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트럼프 때문에 여전히 시끄럽다. 부동산 투기사업으로 거부가 된 그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외친 것에 미국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폐해는 실로 컸다. 모리배의 국회의사당 침탈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야기시켜 미국을 최고의 민주국가에서 최악의 민주주의 후진국으로 추락시킨 것이다. 이제 와서 트럼프를 반란의 수괴로 규정하느냐 마느냐 문제로 나라가 온통 요란스럽지만 준비되지 않은 ‘어쩌다 대통령’의 후유증은 이처럼 크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도 어쩌다가 대통령이 된 대표적 인물이다. 희극배우 겸 배우였던 그는 ‘인민의 종’이라는 드라마에서 청렴하고 공정한 대통령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가 졸지에 실제 대통령이 되었다. 이 드라마가 흥행하며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이를 발판으로 정치 경력이 전무함에도 한 방에 대통령을 거머쥔 것이다. 그는 전쟁 초기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러시아에 조기 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불굴의 항전을 이끄는 바람에 세계로부터 ‘새로운 대통령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가 푸틴과의 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되든, 아니면 국토의 일부분을 넘겨주거나 혹은 자신이 추구하던 EU·나토와의 동맹을 포기하고 적당한 타협으로 휴전을 택하든 이미 무수하게 죽은 국민과, 삶의 터전을 잃고 이웃나라로 피신한 그 엄청난 난민들에게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가 없다. 전쟁의 영웅이기 이전에 전쟁을 불러들인 그 책임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한때 논란이 된 코미디언 출신의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 문제를 재론하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무게감은 이렇듯 크다는 걸 얘기하는 것이다.

‘어쩌다’를 노리는 인사들이 지금 우리지역에도 출몰하고 있다. 충북도지사를 하겠다며 느닷없이 나타난 이혜훈 김영환이다. 그들의 취약한 지역연고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어 단 몇 분-몇 시간, 길어야 하루 단위로 움직이고 충북 역시 수도권으로 묶이면서 글로벌을 추구하는 마당이라면 부친이 충북에 잠시 살았느니, 중고등학교를 이 곳에서 나왔느니 따지는 것은 촌스럽다. 능력만 있으면 도민들이 먼저 나서 모셔와야 하는 게 경쟁시대를 사는 지혜다. 정작 문제는 그들에 대한 도민들의 정서적, 실체적 괴리감에 있다.

자신들의 호시절엔 다른 곳에서 누릴 대로 다 누리다가 중앙 정치권에서 찬밥 신세가 되니까 이제 와서 충북에 빨대를 꼽겠다는 그 심보가 역겨운 것이다. 그들이 공장 몇 개를 들여오고 정부예산 몇 푼을 더 따온다고 해서 도민들의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충북인으로서의 자존감 실추, 자격지심이 가져올 박탈감이 더 클 수 있다. 그들이 출마의 변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힘있는 정치인’, ‘튼튼한 중앙인맥’이라는 점도 귀에 거슬린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충북 정치인들은 헛껍데기 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그들이 불편한 이유는 또 있다. 만약 윤석열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충북지사 욕심을 가질 리가 만무하다. 그들에게 ‘어쩌다’ 요행을 부추긴 것은 다름아닌 지난 대통령선거의 학습효과다. 자신들에게 닥치고 표를 찍는 그 광풍을 또 한번 누리고 싶은 것이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떠한 경우라도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도지사라는 직책 역시 마찬가지다.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야 김대중이 말한 것처럼 쓰리고 아릴 게 없는 어쩌다 대통령과 어쩌다 도지사의 최고 업적으로 남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통령’과 ‘어지사’가 준비없이 누리게 될 어설픈 권력이 가져올 역기능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잘못하면 나라를, 지방정부를, 내 가족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오로지 ‘정권교체’ 하나만을 부르짖으며 대통령이 된 윤석열 당선인이 선거가 끝난 후 이 엄중한 시기에 골든타임을 청와대 이전과 여가부 폐지라는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낭비한 것을 국민들이 쉽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어통령’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지금 ‘어차피 국민들’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국정을 잘 모른다는 고립감 때문에 그가 이른바 시스템의 통치보다는 윤핵관 논란이 보여준 지금까지의 조짐처럼 측근이나 이너서클의 울타리에 갇히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이만저만 아니다. 그들의 발호 개연성은 이미 당내 중진들로부터도 제기되지 않았는가.

배철수가 이끄는 그룹사운드 송골매는 노래 ‘어쩌다 마주친 그대’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우연히, 어쩌다가 맞이하는 대상은 이처럼 기대와 설레임, 희망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어쩌다 대통령이 된 윤석열도 꼭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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