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수의 메아리] 최초의 음성품바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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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수의 메아리] 최초의 음성품바는 누구일까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2.09.0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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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국장
김천수 취재국장

오는 21일부터 5일 동안 음성품바축제가 음성설성공원 일원에서 개최된다. 코로나19 영향으로 3년 만에 현장에서 열리는 축제다.

올해로 23회째인 음성품바축제는 거지 축제를 왜 하냐, 고향을 거지 동네로 만들거냐 등 논란 속에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이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 연속 지정한 축제가 됐고, 충청북도의 7년 연속 최우수 축제다. 해학과 풍자를 즐기면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정신문화축제로 승화됐다는 평가도 듣는다.

품바는 장터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동냥하는 사람으로 걸인을 뜻한다. 품바타령은 장타령으로 걸인들이 장터나 동네에서 동냥을 다니며 위안을 삼거나 동냥밥을 준 고마움으로 즉석에서 불러주던 구전 노래다. 각설이 타령으로도 불리는 데 각설이는 장타령꾼을 이른다.

오늘의 음성품바축제를 있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관심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알고 있는 故 최귀동 할아버지다. 최 옹이 축제를 만든 것이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품바축제는 생겨날리 없었을 것이다.

음성군의 자료에 따르면 최귀동 할아버지는 40여년 동안 무극다리 밑에서 남은 밥을 얻어다 걸인들과 나누어 먹으며 생활했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다리 밑 생활터전에서 쫓겨내자 용담산 밑에 움막을 치고 생활하게 된다. 이 움막은 그와 오웅진 신부의 역사적인 만남의 현장이 됐다. 최 옹은 일본에 징용됐다가 정신적인 장애를 갖고 귀국했지만 가정은 파산돼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현장을 목격한 오 신부는 주머니돈 1300원을 털어 시멘트 한 포대를 사서 벽돌을 찍고 교우들과 함께 부엌 다섯칸짜리 건물을 만들어 이들을 입주시켰다. 이때가 1976년 11월 15일이다. 이것이 계기가 돼 오 신부는 음성군 맹동면에 꽃동네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꽃동네 1000원 돕기 운동을 펼쳤다. 국제적으로 퍼져 나간 현재의 사회복지법인 꽃동네에 이르게까지 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이 과정에서 1986년 2월 15일 가톨릭 대상(사랑부문)을 수상했다. 부상으로 120만원을 받았다. 다음날 무극성당에서 축하잔치가 열렸고 당시 청주교구장이던 정진석 추기경도 참석했다. 축하잔치 전에는 무극초 어린이들의 고적대 밴드에 맞춰 카퍼레이드도 있었다. 이러한 기록과 사진들도 남아있다.

최 할아버지는 1990년 1월 4일 평소 지병인 혈압이 재발해 인곡자애병원에 모셔져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어"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이미 그는 1984년 2월 28일자로 눈 못보는 형제를 위해 사망 후 안구를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에 따라 27세된 젊은 청년이 눈을 뜨게 되었다.

음성품바축제에서는 각설이 타령을 하는 많은 품바를 만나게 된다. 거지성자 최귀동 할아버지가 최초의 음성품바는 아닐까. 타령을 할 줄 아는지는 몰라도 그는 어려움 속에도 나눔과 사랑을 몸소 실천한 진정한 음성품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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