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참살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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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참살이를 위하여
  • 홍성현 청주동물원 수의사
  • 승인 2022.09.28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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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무료함 달래기 위해 ‘행동풍부화’ 통해 새로운 흥밋거리 도모

지난달부터 테니스를 배우고 있다. 3초에 한 번 자세를 지적받는 입문자 실력이지만 어색한 몸짓과 라켓에 공이 부딪쳐 튀는 감각 모두 새로운 느낌이어서 몸과 마음에 굉장한 자극을 준다. 보기엔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사부랑삽작 몸을 움직인다.

이전에 대학생 시절 사물놀이를 처음 배웠을 적에도 비슷한 자극이 있었다. 웃다리 사물놀이의 박자를 쉽게 알려주는 기법이었던 간짜장 간짜장 짜장 말고 간짜장으로 시작하는 이상한 노래를 열창하는 20대 중반 선배들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던 기억은 차가운 파도가 머리카락 아래 두피를 때리는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히말라야 원숭이.
히말라야 원숭이.
반달가슴곰 

 

이 두 가지 기억 모두 삶에 긴장감을 주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무료함-피로를 타파하며 기분을 고양시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무료함이 지속되면 피로가 축적되는 건 사람과 동물이 마찬가지다. 무료함이란 흥미 있는 일이 없어 심심하고 지루한 상태를 말하는데 흥미 있는 일을 만들어 이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다. 필자에겐 테니스를 배우는 일과 사물놀이를 배우는 일이 좋은 흥밋거리였다.

몇 년 전 확장한 청주동물원 반달가슴곰 방사장은 가장 긴 직선 길이가 약 25m이다. 25m를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투입됐다. 하지만 자연에 사는 반달가슴곰들은 하루에 10km 육박하는 거리를 걷거나 하루 종일 사람의 눈을 피해 수풀에 숨었다가 나무 열매를 따먹으러 높은 가지에 올라가거나 그 자리에 둥지를 만들어 낮잠을 자면서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행동풍부화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연에 비해 턱없이 좁은 공간 속에 사는 우리 동물 친구들의 무료함은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까. 바로 행동풍부화를 통해서 새로운 흥밋거리를 도모한다. 행동풍부화라는 말은 다소 어색하지만 해외에서 ‘Behavior Enrichment’가 들어와 어색한 직역식 단어가 되었다. 행동풍부화란 동물의 풍부한 행동을 유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스크럽(의료 현장의 근무복장)의 반팔 소매 안으로 선선한 공기가 들어와 어깨를 간지럽히면 동물원을 방문하기 가장 좋은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쾌청한 하늘이 동물원으로 손짓하면 전문성을 갖춘 시민단체나 관련 전공 대학생들이 종종 행동풍부화 자원봉사를 하러 동물원을 방문한다.

커다란 나무를 통째로 잘라 반달가슴곰이 타고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 설치해 주거나 폐-소방호스를 사용해 높은 나무 위에서 낮잠 자는 둥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 해먹을 만들어서 설치해 주는 등 대형 작업은 이런 기회를 활용한다. 동물 친구들은 새로운 가구가 들어오는 즐거움을 맛보고 방문객들은 동물들이 새로운 환경을 탐색할 때 보이는 행동들을 볼 수 있다. 눈으로 발견하면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앞발과 뒷발을 이용해 샅샅이 수사하기도 하고 몸을 비벼보기도 한다.

만약 평소 근무하는 서너명의 직원들끼리 이런 작업을 시도했다간 산업재해 수준의 노역이 될 수 있어서 이런 봉사활동은 무척이나 반갑다.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우리 친구들을 더 자세히 소개해 줄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창의적인 직원들은 동물 친구들에게 새로운 흥밋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단히 고심한다. 빠른 유속을 조성해 주기 힘든 수달 방사장 연못 안에 뗏목을 만들어 띄운 날 수달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뗏목에 올라타는 요령을 깨우칠 때까지 물장구를 쳤다. 그리고 소방호스를 스쿠비두 매듭으로 엮어 여러 가지 과일을 끼우고 히말라야원숭이 방사장 안에 걸어줬더니 평소 흥미가 잘 일지 않는 노령의 히말라야원숭이 히정이도 잘 익은 바나나를 골라 엑스칼리버처럼 열성으로 뽑아 와앙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 땅을 파헤쳐 먹이를 숨기는 붉은여우들의 방사장에는 반대로 땅속에 굼벵이를 넣어 가볍게 덮었더니 마치 보물 찾기에 집착하는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온 방사장을 헤집어놓았다. 행동풍부화는 무료함을 해소해 주는 역할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에 최적화된 근육이나 발톱을 사용하게 하기 때문에 동물 친구들이 더 건강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한다.

 

모범 교도관이 되기 위해

 

누군가는 동물원을 포로들의 정원이라 불렀다. 그 말에 따르면 직원들은 교도관인 꼴이기 때문에 우리가 듣기에 꽤 모진 말이지만 단편적으로 평가하면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동물들이 방문객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동물원은 앞으로도 사람과 동물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을 것이다. 방문객뿐 아니라 돌아갈 야생 서식지가 없는 우리 동물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계속해서 공간의 제약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악질 간수는 되지 않도록 꾸준히 새로운 흥밋거리를 개발하고 동물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동물원의 위생 관리와 먹이 급여 등 기본업무가 끝나고 뒷정리를 마치면 퇴근 시간이 불쑥 다가와 있는 날이 많다. 하지만 어김없이 또다시 어지르기 시작한다. 누가 동물원 아니랄까. 호박을 잘라 속을 파내 견과류를 가득 담아 보물 상자처럼 만들거나 동물 친구들이 예상치 못한 틈새에 간식거리를 숨기러 동물사 안을 다시 들어가는 날도 많다.

홍성현 수의사
홍성현 수의사

동물 방사장 안이 번잡하게 가구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사이사이를 능숙하게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본다면 행동풍부화 환경이 잘 조성된 동물원임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청주동물원 직원들은 모범적인 교도관이 되어 동물 친구들을 위해 다양한 흥밋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언젠간 왼쪽으로 달려가서도 공을 칠 수 있는 기술인 백핸드 스윙도 배울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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