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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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10.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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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의 정의 논쟁 :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동체주의 (1)

고교 윤리시간에 고대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 실존주의로 끝나는 그 많은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이 말하는 철학을 외우면서, 미국의 철학에 대하여 외울 것이 있었다면, 19세기말 듀이(John Dewey)로 대표되는 실용주의(pragmatism)가 유일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중후하고 난해한 것이 철학일 것이다라는 막연한 우리 통념에 의하면 실용주의 철학이란 그 자체 형용모순일 것이고, 실제 철학계에서도 이런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미국의 철학, 그 대표로서의 실용주의는 먹물 먹은 식자들이 배울만한 것이 못 되는 것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혹시 아시나요? 현대 정치철학계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미국은 이미 20세기 중반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철학으로서의 정치학마저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2차 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 출신 철학자들(아렌트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의 기여도 일부 있었지만, 세계 정치철학계에서의 미국이 지금과 같은 확고한 위상을 갖기 시작한데는, 미국 태생으로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한 롤즈(John Rawls) 교수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971년 발간된 그의 ≪정의론≫은 전 사회과학 분야를 망라한 20세기 최고의 저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그 이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위 저작의 결론에 대한 자신 나름의 판단을 언급하지 않고 시작하는 정치철학서는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하버드 3인방, ‘정치철학의 왕국미국을 만들다

 

롤즈의 정치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동료 교수로부터 나왔습니다. 바로 노직(Robert Nozick) 교수입니다. 그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1974)는 명백히 롤즈적 정의에 대한 반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노직은 롤즈의 정의는 정의롭기는커녕 오히려 범죄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같은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치던 샌덜(Michael Sandel) 교수가 노직과 마찬가지로 롤즈의 정의를 비판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샌덜은 2010년 우리 서점가에서 생뚱맞은 열풍을 일으켰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도 롤즈적 정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방향은 노직의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이렇게 하버드내 정치철학 과목을 담당하던 3명의 석학들에 의하여 현대 정치철학의 3대 주류인 자유주의(Liberalism),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정립 발전되게 된 것입니다. 현실 사회주의(구소련과 동구권) 몰락의 과정에서 유럽의 정치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지독히 사변적이고 난해한 포스트 모던류의 사상에 함몰되어 헤매는 사이, 이들 3대 석학에 의하여 미국이 지독히 비미국적으로 보였던 정치철학에서조차 최고의 논쟁마당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제 상상력을 가장 자극한 동화책은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원제는 2년간의 휴가)≫입니다. 이는 15명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2년간 표류하면서 겪는 갈등과 모험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 그 소년들은 공동체를 운영할 여러 규칙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그들이 맨 처음 한 공동 결정은 대장을 뽑는 것이었던 같은데, 그들이 정해야 할 여러 규칙 중에는 공동의 획득물에 대한 분배 규칙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내용의 분배규칙에 서로 합의할까요? 롤즈의 정의론은 바로 이러한 가상의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롤즈의 정의 구상의 독특한 아이디어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입니다.

 

원초적 상황과 무지의 장막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of fairness)에 있어서의 평등한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사회계약론에 있어서의 자연 상태에 해당한다. 이 원초적 입장을 역사상에 실재했던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문화적 원시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정한 정의관에 이르게 하도록 규정된 순수한 가상적 상황으로 이해된다. 원초적 상황이 갖는 본질적 특성 중에는 아무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계층상의 위치를 모르며, 누구도 자기가 어떠한 소질이나 능력, 지능, 체력 등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심지어 당사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순수한 심미적 성향까지도 모른다고 가정된다. 정의의 원칙들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선택된다. 그 결과 원칙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무도 타고난 우연의 결과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으로 인해 유리하거나 불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보장된다. 모든 이가 유사한 상황속에 처하게 되어 아무도 자신의 특정 조건에 유리한 원칙들을 구상할 수 없는 까닭에,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한 합의나 약정의 결과가 된다. - 롤즈의 정의론

 

각자가 자신의 능력·재산·지위·성향 심지어 운수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이 합의하게 되는 분배의 원칙이 바로 가장 정의로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롤즈가 무지의 장막을 상정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이념적 성향 등을 잊음으로서 자신에게 유리한 원칙이 아닌 공정한 심판관의 관점에서 누구에게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나 공평한 정의원칙을 찾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예컨대 자신이 어떤 조각의 사과를 먹게 될지 모른다면 더 공평하게 사과를 자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롤즈는 선험적인 이념적·정파적 교리나 종교적·도덕적 설득에 따른 정의가 아니라, 이러한 절차적 공정에 따른 불편부당한 정의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지의 장막하의 원초적 상황에서 선택될 정의의 원칙은 어떤 내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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