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포스트(post)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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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포스트(post)는?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12.2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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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중심으로 (2)

 

전회에서 : 라클라우와 무체는 마르크스주의 위기의 원인은 본질주의적 접근방식, 즉 토대(경제) 결정주의, 계급 환원주의,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특권, 사회주의 필연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람시와 알튀세르는 이에서 벗어날 여지를 만들었지만, 궁극적으로 본질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사회분석과 변혁전략의 기초는 그람시와 알튀세르가 최후의 보루로 잡고 있는 본질주의적 한계를 아예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를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 즉 총체성으로 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알튀세르를 따라 사회를 수많은 이질적이고 비고정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의 복합체라고 봅니다. 물론 알튀세르의 최종 심급으로의 경제 논리는 거부됩니다. 사회적 행위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개인의 주체 위치와 정체성은 경제로만 즉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하나의 기표만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A는 자본가이면서도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일 수 있고, B는 노동자이면서도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하고 극우운동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AB간의 여타의 정체성과 대립은 부수적이며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고, 경제 영역에서 정해지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정체성과 대립만이 본질적이며 근본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자본-노동이라는 특정한 담론에 따른 것에 불과합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주체위치와 정체성을 띄고 전혀 다른 대립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람시의 최후의 보루였던 계급 환원주의와 노동계급의 역사적 특권은 거부됨은 물론, 예정된 특정한 경로에 따른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질주의와 급진 민주주의 전략

 

라클라우와 무페에 따르면, 모든 요소, 주체위치, 정체성, 대립, 담론, 접합 등은 등가적이고 비고정적이고 우연적인 것입니다. 이들은 특정한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만 잠정적으로 고정되어 헤게모니 구성체를 이루게 됩니다. 즉 하나의 사회는 우연적인 상황과 맥락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일련의 헤게모니적 실천들이 일시적으로 불안정하게 접합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 이러한 헤게모니적 접합의 구축은 좌우파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예컨대 페미니즘, 생태주의, 인종차별 반대, 반전반핵 운동은 상이한 양식을 토대로 적대를 구축하려는 다양한 헤게모니적 실천에 따라 자유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적으로 접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파를 위한 새로운 변혁전략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까요? 라클라우와 무페는 급진 민주주의전략을 제시합니다. 이는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 좌파적 헤게모니 기획에 따라 수많은 사회적 요구와 투쟁들을 등가사슬로 엮어 새로이 접합시키는 것입니다.(무페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출간 이후 30여년만에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2018)이라는 책을 내놓았는데, 급진 민주주의라는 모호한 명칭을 버리고, 이를 보다 색채가 분명한 좌파 포플리즘(Left Populism)’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접합에서 선험적으로 특권이 부여되는 계급과 담론은 없으며, 구축된 접합은 고정적·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우연적인 것이고, 변혁 기획에서는 기존의 사회주의 전략과 전혀 다른 자리매김이 들어섭니다. 이 기획에 의하면 민주주의 투쟁은 일반의 범주에 해당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일반으로 간주했던 노동운동이나 계급투쟁은 여러 민주 투쟁 중의 하나로 특수의 범주로 전환됩니다. 이 기획에서도 사회주의는 기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회주의는 이 기획의 여러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수정 vs 배신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통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는 비단 저자들 뿐만아니라 모든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던져질 수 있습니다. 저자들이 본질주의적 접근방식으로 명명한 경제 결정주의, 계급 환원주의, 노동자계급 중심주의, 사회주의 필연성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부정하는 저자들의 헤게모니 이론에 과연 마르크스주의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이 과연 합당할까요?

 

1백여년 전 마르크스주의 진영내부에는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수정주의라는 세기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이행경로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측(자본주의 위기의 점증,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으로의 양극화, 노동자계급의 내부적 동질화,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주의 붕괴를 전제로 한 파국적 혁명 전략은 폐기되고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를 통한 사회개혁 전략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연대 구축과 다양한 영역에서의 점진개혁 투쟁을 통하여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최초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수정·개량주의는 로자(Rosa Luxemburg)와 레닌(Vladimir Ilich Lenin)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으로 규정되었고, 그의 책은 마르크스주의 진영내에서 금서로 취급되었습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도 그와 유사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책은 1990년대 초반 국내에 사회변혁과 헤게모니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 출간되었는데, 당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지배하던 운동권 내에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로 취급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백여년이 지난 지금 베른슈타인과 그의 노선은 여러 각도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으며, 처음 등장 당시 이념적 정체성을 의심받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지금은 마르크스주의 진영내에서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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