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세상, 빗줄기 5t…연극 ‘만선’
상태바
기울어진 세상, 빗줄기 5t…연극 ‘만선’
  • 이숙정 전문기자
  • 승인 2023.03.23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작에 시의성까지 담아 돌아온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흑백 무대 위로 쏟아지는 폭우, 우리나라 사실주의의 ‘걸작’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3월 16~4월 9일, 매주 6회 공연 중
빗줄기 속에서 울부짖는 곰치 역의 배우 김명수
빗줄기 속에서 울부짖는 곰치 역의 배우 김명수

만선은 어획한 물고기로 배가 가득 찼을 때를 말한다. 만선(滿船)을 이끌고 귀항하는 것은 당연히 모든 어부의 꿈이자 로망일 것이다. 농부가 풍년을 기원하고 직장인이 두둑한 연봉과 성과급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듯 말이다. 사실 십수 년 전 전남 강진의 한 항구를 취재차 다녀온 것 외에는 바다의 삶을 알지 못한다. 새벽녘 어둠 속에서 기형적으로 불을 밝힌 배들이 정박해 있던 항구의 모습과 배에서 내린 수많은 어종을 경매하던 사람들의 분주함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좁혀지지 않을 공감과 이해의 폭을 줄이기 위해 모든 감각을 무대에 집중했다.

<만선>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이다. 같은 해 7월 초연(연출 최현민)되었으며, 천승세 작가는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대상)에서 이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2020년 국립극단은 심재찬 연출과 함께 창단 70주년 기념작으로 연극 <만선>을 제작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이 되어서야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평단과 관객의 극찬이 이어지면서 2023년 드디어 재연 무대로 돌아왔다.


곰치 가족의 불행이 말하려는 것

무대는 1960년대 어촌 마을의 일부를 형상화했다. 15도쯤, 아니 그 이상 기울어져 보이는 무대는 사선으로 패인 바닥 때문인지 평온해 보이기보다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무대 한편에 자리한 오두막은 왜곡된 화면처럼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겨우 버티고 서있는 곰치의 집은 집이라기에 허술하기 짝이 없다. 멀리 어선의 깃발이 보이고 기울어진 언덕 너머로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흑백의 농담으로 그려진 그림 같은 무대 위로 선 굵은 모습의 곰치가 등장한다.

곰치는 어부다. 아버지가 어부였고 할아버지가 어부였다. ‘만선이 아니면 노를 잡지 말라는 조부의 가르침이 곰치에겐 삶의 나침반이었다. 아버지에게 배운 부서 맷돌질이라는 배 부리는 기술과 바다와 맞서는 베짱이 자신의 자부심이자 존재 이유이다. 아들 둘을 바다에서 잃었지만, 그것이 어부의 숙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곰치는 자기 배를 갖고 있지 못해 마을의 악덕 선주에게 배를 빌려 조업을 하는 가난한 어부일 뿐이다.

빚이란 것은 돌아서면 불어나기 마련이다. 악덕 선주는 곰치가 빌린 돈에 높은 이자를 붙여 곰치가 잡은 어획물을 모두 가져가 버린다. 설상가상 돈을 갚지 않는다고 배를 묶어 버리고 만다. 사나흘 만선을 해서 빚도 청산하고 똘망배라도 마련하려는 희망은 현실 앞에 무너져 버린다. 다음날 선주는 곰치에게 배를 내어주는 대신 내일까지 밀린 빚을 갚고 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내민다.


무대 위로 쏟아지는 5톤의 비

‘만선’의 리얼리즘은 기울어진 무대와 그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초의 바람이 꺾이는 사회구조는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보여준다.
‘만선’의 리얼리즘은 기울어진 무대와 그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초의 바람이 꺾이는 사회구조는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보여준다.

바다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곰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들 도삼이와 딸 슬슬이의 연인 연철을 데리고 바다로 나간다. 곰치는 비바람에도 쌍돛을 달고 부서(보구치) 떼를 몰아 만선을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배가 난파되고 만다. 아들 도삼과 연철은 죽고 곰치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지만, 이 소식을 들은 구포댁은 정신줄을 놓게 된다. 한편 슬슬이는 집에 빚을 갚아주겠다는 구실로 자신을 겁탈하려는 범쇠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고 만다. 설상가상 정신을 놓은 구포댁은 어린 막내를 배에 태워 바다로 보낸다.

곰치 가족의 불행은 110분 동안 지긋지긋하리만치 계속된다. 온 집안은 난장판이 되고, 곰치는 어린 막내를 구하기 위해 널쪽을 들고 바다로 뛰어든다. 무대를 집어삼킬 것 같은 천둥소리와 파도 소리, 그리고 뒤를 이어 무대 위로 쏟아지는 비와 물줄기의 비릿한 물 냄새가 진동한다. 그 서늘한 기운이 공연장을 가득 메우면 곰치와 구포댁이 비에 젖은 몸을 일으켜 세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선 이 둘은 원망과 한이 가득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한다. 잠시 관객도 박수를 잊는다.

극의 배경인 어촌 마을과 바닷가의 폭풍우를 실감 나게 구현한 무대는 제31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태섭 무대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극의 마지막 무대 위로 쏟아지는 5톤의 비는 이 공연의 백미다. 사실감을 더하는 무대에 압도되면서도 한 장면으로 구포댁과 곰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심재찬 연출은 올해 공연에서는 음향, 조명, 무대 등의 디테일을 조금 더 발전시켜 사실주의 희곡에 충실한 무대 연출을 이어갈 예정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사실주의 무대가 주는 깊은 감동

이 작품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비판적 한국 리얼리즘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연극 역시 원작에 충실하다. 선주들의 경제적 수탈은 가난한 어부들의 삶을 빈곤의 악순환 속에 빠트리게 했다. 곰치네 가족의 파멸은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리대로 서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악덕 선주 임제순이나 약자의 약한 고리를 잡아 횡포를 저지르는 범쇠 같은 인물들은 어느 시대나 존재한다.

평생 배 타는 일밖에 몰랐던 곰치는 자식이 죽고 집이 풍비박산 나는 상황에서도 어부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외골수 기질과 고집이 자식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지만, 바다를 향한 그의 마음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대체 믓이(무엇이) 만선이여? 누구를 위한 만선이여?”라며 죽기 직전 울부짖는 슬슬이의 대사는 아버지와 세상을 향해 있다. 변하지 않는 아버지, 즉 낡은 구시대 가치에 대한 원망과, 약자에 대한 횡포가 멈추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절규였을 것이다. 슬슬이의 저항과 죽음은 1960년대 이야기를 2023년의 무대로 불러내 공감의 폭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명작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배우 김명수와 정경순이 초연에 이어 다시 곰치와 구포댁으로 무대에 오르며 초연의 감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국립극단 단원들의 믿고 보는 연기가 더해져 명작을 명작답게 만든다. 예매는 국립극단 홈페이지와 인터파크에서 가능하며, 330일부터 41일까지 3일간은 음성해설, 한국수어 통역, 한글자막이 함께 제공되는 배리어 프리 공연으로 운영된다.

326일 공연 종료 후에는 심재찬 연출, 김명수 배우(곰치 역), 정경순 배우(구포댁 역)이 참여하는 예술가와의 대화가 진행되며,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는 영어 자막(316, 330일 제외),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한글자막을 운영한다. 연극 <만선>의 무대는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을 통해서도 관람이 가능하다. 온라인 극장에서는 2021년 공연된 작품을 녹화 상연하고 있는데, 2023년 재공연되고 있는 무대와 비교해 본다면 더 큰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연극 <만선>

- 공연날짜 : 2023316~ 49
- 공연장소 : 명동예술극장

- 공연시간 : 평일 1930/, 일요일 15/화요일 공연 없음. 매주 목요일, 일요일 영문 자막(3.16, 3.30 제외), 매주 월요일, 금요일 한글 자막
- 관람연령 : 14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10
- 원작 : 천승세
- 윤색 : 윤미현
- 연출 : 심재찬
- 무대 디자인 : 이태섭
- 출연진 : 김재건, 김종칠, 박상종, 김명수, 정경순, 조주경, 김경숙, 정나진, 황규환, 문성복, 강민지, 성근창
- 공연문의 :1644-2003
- 공연예매 :인터파트 티켓, 국립극단 홈페이지

●이숙정

공연전문 객원기자이자 비정규 에세이스트. 인터넷 매체 <민중의 소리>에 공연, 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오디오 플랫폼 <나디오> 오디오 작가로 활동 중이며, 화성시 문화재단 뉴스레터에 칼럼을 썼다. 포토 에세이집 <나도 처음이야, 중년>, 비정규직 노동자 취재기 <세상을 바꾸는 2%, 나는 비:정규직입니다>를 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