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끈질긴 악(惡)의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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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끈질긴 악(惡)의 ‘특수성’
  • 이재표 기자
  • 승인 2023.05.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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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표 칼럼 ’외딴 우물’

독일인이 행한 끔찍한 범죄에 용서를 구한다. 독일의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419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한 연설 중 일부다. 슈타인 마이어는 이날 가슴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노란색 다윗의 별을 달았다.

197012,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유대인 위령탑에 무릎을 꿇은 이후로 독일의 사과는 매년 반복되고 있다. 이쯤 되면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차원을 넘어서 다시는 악을 범하지 않겠다는 처절한 자기 다짐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 일본 기시다 총리는 A급 전범들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의 춘제(春祭)내각총리대신명의로 공물을 보냈다. 일본 의원 여든일곱 명은 직접 참배했다. 전범(戰犯) 국가 두 나라의 상반된 모습이다.

악은 평범하다는 한나 아렌트의 가설을 부정하게 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나치의 비밀경찰 아이히만의 재판에 주목했다. 독일 전범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가 노인이 돼서야 이스라엘 법정에 세워졌다. 그는 행정관료로서 시키는 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어디에서도 악마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이론이 악의 평범성이다. 악은 보통사람의 일상에서도 자라는데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이나, 아니면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말의 무능’,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하지 못하는 관점의 고착때문에 발현된다는 것이다.

반성을 모르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서 악의 특수성을 느낀다. 해상교류가 무역과 외교의 전부였던 시절, 동아시아에서 해난사고(海難事故) 처리는 호혜(互惠)’가 원칙이었다. 표류한 이들을 극진히 보살펴 대개 중국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국제질서를 대놓고 거스른 나라가 해적국가가 일본이었다. 왜구들은 표류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들의 길목을 노렸다. 조선의 해안은 늘 왜구들의 습격에 시달렸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은 유구국(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 섬라곡국(타이), 조와국(인도네시아 자바) 등과도 활발히 교역했는데, 왜구들은 물품을 빼앗고, 사람들을 납치하기 일쑤였다. 결국 조선의 동남아 무역은 중단됐다. 왜구들은 심지어 조선에 오는 류큐 사신들의 배를 습격한 뒤 자신들이 사신인 것처럼 조공하기도 했다. 조공을 받는 나라가 답례로 내려주는 이른바 회봉(回奉)’이 훨씬 더 후했기 때문이다.

민족(民族)은 혈통과 인종이 국가와 버무려진 매우 모호한 개념이지만, 일본국민의 민족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군국주의자들에 대해서만은 왜구DNA’라는 악의 특수성, 비범성을 느낀다는 얘기다.

이재표 편집국장
이재표 편집국장

사과는커녕 매우 애석하고 아쉽다통석(痛惜)의 념()”이나 지껄이는 군국주의자들에게 일본이 100년 전의 일로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에는 생각이나 말이 무능하고, 피해당사자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악의 평범성이나 탓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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