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소굴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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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소굴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06.2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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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바람, 유쾌하고 쾌활한 사람들

정연일의 지중해 섬기행⑦

시칠리아에 여행을 간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위험하지 않냐고 묻는다. 영화 대부를 비롯해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마피아 영화 때문에 굳어진 마피아의 본거지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여전히 마피아는 활동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정부의 마피아 소탕과 억제정책 덕분에 과거보다 마피아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현지의 법과 관습, 문화를 크게 벗어나게 행동하거나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일반인 여행자가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를 조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부산이나 목포에 여행을 갔다고 해서 한국 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던 조폭을 만나는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팔레르모 근교 사라센 해변의 호텔 풍경. 사진=정연일
팔레르모 근교 사라센 해변의 호텔 풍경. 사진=정연일

마피아의 탄생은 시칠리아의 역사와 겹친다. 여러 설이 있으나 잦은 외침과 외부에서 들어온 지배세력의 교체로 현지 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꾸린 비밀 자경단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마피아의 어원 역시 그렇다.

12세기에 바이킹 노르만 왕조가 아랍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자 기존의 지배세력이었던 이슬람 세력은 시칠리아를 탈출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비밀스러운 곳에서 숨어서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은신처나 도피처를 일러 마피아(mafya)라고 했다고 한다. 그늘진 어두운 장소라는 뜻이다.

아랍어에서 유래한 마피아는 이탈리아어 시칠리아어로 들어와서 마피아(Mafia)가 되었다. 역시 뜻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시칠리아어로는 대담함, 자긍심, 거들먹거리며 걷기 등이 있다. 마피아는 무솔리니 통치 시절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며 부활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며 경제 부흥 붐이 일었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특히 가난한 남부 시칠리아의 좌경화를 막으려는 집권 우익세력이 마피아를 좌파 세력 탄압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1960~1980년대의 마피아의 전성시대는 엄청난 유혈사태의 시대였다. 허구한 날 암살과 폭탄테러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참다못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반발로 90년대에 반()마피아 법이 의회에서 통과되며 이탈리아 정부와 마피아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해외 토픽의 단골 소재였던 마피아 소탕 검사의 폭탄 테러 암살 등이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많은 조직원이 죽었거나 감옥에 있어 마피아의 세력은 크게 약해졌지만, 여전히 시칠리아에도 50여 개 파에 4000여 명의 조직원이 있다고 한다. 2010년 대 중반 유럽 전역에서 알카에다와 IS의 테러가 일어났을 때, 이탈리아는 안전했던 이유가 마피아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는다.

시칠리아 여행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해 사람이 없는 골목을 혼자 걷는 건 추천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곳에도 사람은 살지만 우리는 이방인 여행자다. 사진=정연일
시칠리아 여행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해 사람이 없는 골목을 혼자 걷는 건 추천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곳에도 사람은 살지만 우리는 이방인 여행자다. 사진=정연일

앞서 말한 것처럼 여행자 스스로가 현지의 법과 관습을 어기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시칠리아 여행 도중에 마피아를 만나 곤란한 일이 생길 확률은 낮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행의 낭만적 분위기에 취해 소지품 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혼자 사람이 없는 좁은 골목을 너무 깊숙하게 들어가지만 않으면 된다. 팔레르모 항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루프탑에서 내려다본 팔레르모 항구 뒤편은 마치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산동네에 형성됐던 판잣집 촌을 보는 듯하다. 혼자서 제 발로 그런 곳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다.


대부분 가족 운영 작은호텔 알베르고

이탈리아의 많은 비즈니스가 그렇듯이 이탈리아의 작은 호텔은 대부분 가족 경영 비즈니스다. 남유럽은 중북부 유럽보다, 이탈리아 남부는 북부보다 가족 중심이 더 강하다. 팔레르모 근교에는 사라센이라는 아름다운 휴양지 해변이 있다. 해변의 이름에도 아랍의 역사가 남아 있다. 사라센에서 머물렀던 호텔은 젊은 시절엔 한 인물과 한 미모 했을 듯한 노부부가 운영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시뇨레(이탈리아어로 남자 존칭)는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했다. “이틀 밤을 머물고 체크아웃하며 모든 비용은 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가 한꺼번에 계산할 거다. 나는 돈이 없지만 그 사람은 돈이 많다고 농담을 건넸더니, 웃으시며 이 호텔을 사가라고 하신다. 가족 경영은 대부분 자식이 이어받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이 들수록 힘에 부친다.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물으니 만 나이로 80세라고. 와 그렇게 안 보인다고 60대로 보인다고 말씀드리니 생존해 계신 노모가 103세 시라고. 장수의 비결을 여쭸더니 시칠리아에서 살아서라는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맑고 깨끗한 공기, 여름은 뜨겁지만 건조하고 봄가을은 매우 쾌적하며 겨울에도 춥지 않고 온화한 기후, 그리고 풍부한 농산물과 해산물, 거기에 무엇보다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시칠리아 사람들의 장수 비결이다.

시칠리아 여행 도중에 자주 보이는 대부 프린트 티셔츠.
시칠리아 여행 도중에 자주 보이는 대부 프린트 티셔츠.

이 모든 요소가 시칠리아에 있다. 체크 아웃 후 팔레르모로 가는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택시에 짐을 싣고 떠날 때까지 지켜보시다 손을 흔드시며 웃으시며 물어보신다. “언제 다시 호텔을 사러 올거냐. 장수의 비결에 유머 감각을 추가해야 겠다.

호텔을 이태리어로 알베르고(albergo)라고 한다. 불어 ‘auberge’와 같은 어원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도 같은 어원이다.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 뜻은 막사 또는 숙소를 의미한다.

팔레르모 몬레알레로 가는 택시의 대시 보드에 프랑스어 가이드북 ‘Le Routard’이 보인다. 기사에게 불어를 하냐? 물으니 못 한다고. 어느 프랑스 관광객이 차에 두고 내렸나 보다. 집어 들어 내용을 훑어보니 기사가 나에게 불어 하냐고 묻는다. 못하지만 간단한 내용은 읽고 대충 이해한다고 말했더니, 선물로 줄 테니 가지라고 한다. “근데 그거 가격이 15유로야라고 한다. 돈을 달라는 건지 생색을 내는 건지 농담을 하는 건지, 구별이 어려운 게 시칠리아식 화법이다.

가이드북의 출간 시기를 확인하니 2018년 판이다. 선물은 고맙지만 너무 오래된 책이라 유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며 다시 제 자리에 놓으니 달리는 택시의 핸들에서 양손을 떼며 이탈리아인 특유의 으쓱하는 몸짓을 한다. 영어 드라이버(driver) 를 이탈리아어로 아우티스타(autista)라고 한다.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창업하며 메뉴를 전부 이탈리아어로 만든 것처럼, 뭐든지 이탈리아어로 쓰면 있어 보인다.


가난... 이탈리안 디아스포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태어나고 자란 땅을 떠나는 사람들의 첫째 이유는 그 땅에서 삶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로마를 기준으로 북부가 잘 살고 남부는 가난하다. 대부분의 근대적 공업 도시는 유럽과 맞닿은 북부지역에 있다. 남부지역의 주산업은 농업이다. 남과 북의 소득 격차가 크다.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잘사는 도시에 가면 식당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가난한 남부 출신, 특히 시칠리아 출신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지난해 가을, 밀라노의 호텔 바에서 만난 젊은 바텐더도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칠리아 출신이었다. 시칠리아 여행을 다녀왔고 시칠리아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주문한 생맥주 작은 잔이 큰 잔으로 나왔다. 계산서를 보니 가격은 그대로였다.

시칠리아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트리나크리아. 메두사의 얼굴에 발이 세 개 달렸다. 어원은 그리스 지배시절 시칠리아 섬.
시칠리아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트리나크리아. 메두사의 얼굴에 발이 세 개 달렸다. 어원은 그리스 지배시절 시칠리아 섬.

이탈리아를 벗어나 유럽뿐만 아니라 신대륙인 미국에서도 시칠리아 출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뉴욕의 외곽 조용한 주거지 동네에서도 시칠리아 식당이 있었다. 이민 간 사촌 동생이 괜찮은 이탈리아 식당이 있다고 해서 데려간 곳이 시칠리아 식당이었다. 사촌 동생에게 여기는 이탈리아 식당이기도 하지만 시칠리아 식당이야, 시칠리아 식당이니 음식은 맛있겠다고 말했더니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어왔다.

전 세계 어디에나 시칠리아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칠리아의 상징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가 걸려있다. 그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실내에는 시칠리아계 노인들이 잔뜩 몰려 있었고 시끌시끌했다. 경쾌한 이탈리아어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식당이자 시칠리아계 사랑방 역할을 하는 듯했다. 시칠리아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뉴욕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서비스(?)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탈리아 바깥의 이탈리아 식당의 주인은 대부분 시칠리아 아니면 나폴리 등 남부 출신이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역사도 만만치 않아서인지, 이탈리아 바깥에서 남부 출신 사람들을 만나면 감정이 짠할 때가 많다. 물론 짠한 감정은 나의 것이고, 지중해 출신 시칠리아 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유쾌하고 쾌활하다.

지난 20여 년간 유럽 40여 개 나라를 다녀보니, 중북부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는 잠시 여행은 할 수 있지만 평생 살라고 하면 못살 것 같다. 유럽에는 지중해를 비롯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흑해, 그리고 북유럽의 발트해 등의 내해가 있다. 같은 유럽의 내해이지만, 지중해와 발트해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여름 여행지로는 발트해가 오히려 지중해보다 낫지만, 살아 보라고 하면 고개가 저절로 저어진다. 지중해에서는 살아도 발트해에서는 못 살 것 같다.

팔레르모부터 며칠 동안 함께 다녔던 투어버스 기사 마우로는 시칠리아에서 나고 자랐다. 시칠리아를 떠나 독일에서도 몇 년간 일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왔다. 독일 생활에서 그리웠던 것을 물었더니 답이 줄줄 나온다. 음식 바다 날씨 커피 가족 등등.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독일의 길고 우울한 겨울 날씨였다고.

일은 독일을 포함한 중북부 유럽 사람들과 하는 게 편하다. 융통성은 없지만 정확하다.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과 북부 유럽인들이 보기엔, 너무나 게으르고 무질서하며 어딘가 항상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탈리아 하고도 시칠리아이지만, 우울을 바싹 말려 버리는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의 건조한 바람, 그리고 항상 유쾌하고 쾌활한 사람들이 있다. 마우로가 그리워했던 것들이다. 나 역시 시칠리아가 그리워질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현재 잠시 여행지에서 돌아와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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