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유혼’ 쌍둥이 무덤은 어디에…
상태바
‘최치원 유혼’ 쌍둥이 무덤은 어디에…
  •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고학자
  • 승인 2023.06.28 0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고학자가 풀어보는 귀신과의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전설 대부분, 도굴을 미화했을 뿐
11세기 남송시절 중국 남부 구이저우에서 출토된 황금그릇. 사진=강인욱
11세기 남송시절 중국 남부 구이저우에서 출토된 황금그릇. 사진=강인욱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도 크게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과 관련해서 기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신라수이전>최치원이라는 제목으로 전하는 쌍둥이 귀신과 연애를 하는 유혼(幽婚) 류의 이야기다. 그 배경은 최치원이 어려서 당나라에 단신으로 유학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하여 남경(난징, 南京)의 율수현에 현감으로 초임 발령받은 때이다. 이때 최치원은 한 사연이 있는 무덤을 접한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쌍둥이로 평생을 한 몸처럼 살아온 쌍둥이 자매를 갈라서 부모는 각각 소금장수와 차장수에게 결혼을 시키려 하자 자매는 헤어질 수 없다면서 자살을 택했다는 사연을 접한다. 이에 최치원은 그 애달픈 사연에 감동 받아 시를 써서 위로하자 놀랍게도 그 자매로부터 회답시가 와서 주고받았고, 최치원의 시에 감동한 두 자매의 귀신이 환생해 최치원과 연애했다는 이야기이다. 여름철 납량특집 드라마를 보는 듯, 한편으로는 오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이야기다. 과연 최치원의 이야기는 실재했을까.


실제 발굴된 쌍둥이 무덤

최치원의 쌍둥이 무덤은 신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송나라 때의 기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남아있으니, 제법 유명했던 것 같다. 물론, 실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최치원인지에 대해서 논란도 적지 않지만,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중국 남경시 남쪽 100km에서 이 쌍둥이의 무덤으로 알려진 무덤이 여전히 남아서 사적지로 조성되어있다.

그리고 2012년 남경시 문물국에서는 이 무덤의 정비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무덤은 실제로 앞과 뒤에 각각 하나씩 돌방이 있으며 2개의 관이 함께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최치원이 살았던 때보다 적어도 500~600년 전인 동한시대(서기 55~220)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무덤을 발굴하지 않고 다시 정비하여 덮었다. 실제로 파괴될 우려가 없는 무덤을 굳이 발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이다.

도굴되어 파헤쳐진 2000년 전 흉노인의 무덤.
도굴되어 파헤쳐진 2000년 전 흉노인의 무덤.

발굴하지 않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바로 쌍동이 자매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관이 2개라고 쌍둥이를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 한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2개의 관은 대부분 부부를 함께 묻은 것이다. 쌍둥이를 함께 묻는 경우는 영아 때에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혀 없다. 그러니 쌍둥이의 무덤이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관광 자원화를 하려는 지방 정부로는 그 환상을 깰 필요가 전혀 없으니 정비만 하고 덮어둔 것이다.

이미 누군가가 이 무덤 속을 도굴해서 관이 2개인 것을 알려지면서 여기에 쌍둥이의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런 무덤과 관련된 전설은 곳곳에 많다. 나도 현장을 다니면 현지 주민들의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섞인 무덤 이야기를 종종 들으니 말이다. 다만, 이 쌍둥이 무덤의 전설에는 대문호 최치원의 시가 더해지면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쌍둥이 자매가 환생해서 시를 나누고 심지어 운우지정까지 나누었다는 최치원이 겪은 경험은 과연 진실일까? 당시 최치원의 상황을 보면 그의 이런 환상적인 체험은 가능성이 있다. 어려서 유학을 와서 극도의 외로움에서 살았던 최치원은 고작 20세에 발령을 받았다.

천재적인 능력을 갖췄지만 무척 외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홀로 아름답고 다양한 성몽(性夢)을 꾸지 않았을까. 비몽사몽의 상황에 대한 시가 곁들여지며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것 같다. 마치 19세기 프랑스의 음악가 베를리오즈가 여배우를 그리며 꿈꾼 환상을 풀어낸 환상교향곡처럼 말이다.


천녀유혼과 도굴꾼들

영화 천녀유혼의 한 장면.
영화 천녀유혼의 한 장면.

쌍둥이의 무덤과 같은 귀신과의 사랑이야기는 의외로 고대 중국에서 많이 전해진다. 왕족이나 귀족의 아름다운 공주들에게 연민을 품는 젊은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 사회에서 감히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무덤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세상 계급이나 장벽과 관계없이 저세상 사람이 된 처녀 귀신과 정을 나눈다는 판타지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귀신과 사랑을 나누는 판타지는 인간과 귀신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로 이어진다. 왕조현 주연의 영화 천녀유혼(天女幽魂)’은 청나라 때 모아놓은 그런 귀신과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무덤 속 귀신과의 사랑이야기는 현실로 돌아오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바로 도굴이라는 인간의 욕심과도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기묘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수신기(搜神記)’의 수많은 귀신과의 이야기는 사실 도굴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먼저 노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자. 중국 범양이라는 지역에 살던 그는 밤에 길을 잃어 최소부라는 부자의 집에 들어갔다. 최소부는 그에게 딸을 주었고 그들은 3일간 정분을 나누었다. 하지만 뒤에 알고 보니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옛 귀족의 무덤에 들어가서 이미 귀신이 된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4년 뒤에 그의 결혼한 귀신 부인이 수레를 타고 강에서 나타나 3살 된 아이와 황금 그릇을 그에게 정분의 징표로 주었다. 최소부의 가족들이 가족이 무덤에 넣어준 금그릇을 팔고 있는 노충을 붙잡고 그 연유를 묻자 그제야 털어놓은 것이다.

중국 후베이성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황금그릇. 노충의 고사와 비슷한 시대와 지역임. 사진=강인욱
중국 후베이성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황금그릇. 노충의 고사와 비슷한 시대와 지역임. 사진=강인욱

또 다른 유명한 이야기는 공주의 남편 부마와 관련된 신도탁의 황금베개 전설이다. 전국 시대 말기에 신도탁(辛道度)이라는 젊은이가 공부하러 가던 길에 외딴집에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진나라 민왕(閔王)의 딸과 3일간 부부의 연을 맺고 헤어진 연유로 황금베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후 신도탁이 장터에서 황금 베개를 팔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도굴꾼으로 모는 왕비에게 신도탁은 눈물로 사연을 이야기하고, 실제로 다시 무덤을 파보니 공주의 옷이 흐트러져있어서 신도탁의 이야기가 증명되었다. 이에 신도탁을 실제 사위로 인정하고, 그를 부마도위라는 벼슬에 임명했다는 이야기이다.

꿈에 그리는 아리따운 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고 현실에서도 부귀영화를 얻는 고대판 신데렐라사연들이다. 실제는 어땠을까. 귀신과의 사랑이 아니라 도굴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노충이나 신도탁의 이야기 모두 무덤에서 나온 귀중품을 팔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신도탁 황금베개의 전설에서도 공주의 옷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갓 묻힌 시신에서 귀금속을 떼어내기 위해 시신을 이리저리 뒤집고 옷을 풀어헤쳤기 때문이다.


껴묻거나 훔치거나 피장파장

왕이나 귀족들은 죽어서까지 그들의 영화를 연장하려고 했고, 또 그만큼 도굴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반면에 도굴꾼들은 기를 쓰고 그들의 황금을 얻고자 했다. 귀족들의 유가족들은 노충이나 신도탁이 귀한 황금을 팔고 있는 사연을 모를 리야 없겠지만, 알려지면 자기들의 명예도 추락할 것이니 억지로 인정한 것이 나중에 이야기로 전해진 것이다.

풍소불묘의 도굴된 무덤
풍소불묘의 도굴된 무덤

황금베개와 같은 도굴은 우리 고대사의 여러 무덤을 발굴하면서도 증명된다. 지난 1965년에는 중국 랴오닝성에서는 고구려와 경쟁하던 모용선비가 세운 나라 북연의 귀족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주인공은 서기 415년에 죽은 북연을 건국한 풍발의 첫째 동생인 풍소불과 그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20~3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부인의 무덤은 상태가 이상했다.

보통 무덤의 인골은 위를 향하여 반듯하게 눕는 게 정상인데, 부인의 인골은 특이하게도 한쪽 팔을 밑으로 하고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또 무덤에는 토기 정도만 남아있고, 귀중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어색한 자세로 무덤에 묻을 리 없으니, 바로 도굴을 한 증거이다. 시신이 육탈되기도 전에 무덤을 도굴했고, 옷에 붙어 있는 금붙이를 찾기 위해 시신을 옆으로 들어서 엎어놓은 흔적이다. 황금베개와 같이 무덤에 들어가자마자 도굴이 된 것이다.

여러 문학작품에서 무덤은 현실을 초월하는 로맨스의 현장으로 묘사가 되지만 현실 고고학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무덤의 현실은 다르다. 황금 보화를 얻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옛날 관을 파헤쳐서 썩은 시신 사이에서 돈 될 거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랄 만큼 굶주리던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지 도굴은 끊이지 않았다. 현실에서 무덤은 재화를 얻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표적이 되어왔다. 한국에서도 백제 무령왕릉이나 신라 고분인 대릉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도굴되었다.

찬란한 황금 문화로 유명한 초원의 스키타이 문화를 살펴봐도 오히려 황금이 묻혀 있던 바람에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무덤에 황금 재화를 같이 넣어주는 사람도 이승에서의 호화로운 삶이 죽어서도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넣은 것이니, 어찌 보면 피장파장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고학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고학자

흔히 사랑은 영원하고 국경과 생사를 초월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재물을 향한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돈에 대한 사랑은 가히 견줄 수가 없이 우리 삶에 함께한다. 도굴꾼의 이야기가 귀신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둔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