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는 대한민국의 문화역사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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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는 대한민국의 문화역사영토”
  • 헤이그=이재표 기자
  • 승인 2023.08.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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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주 기념관장, 1995년부터 ‘이준열사기념관’ 운영
1907년 순국한 드용호텔 1995년 매입…1995년 개관
“사인, 아직도 의문. 스테드 기자의 일기를 찾는다면”
1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엄수된 이준 열사 순국 116주기 추모식에서 최형찬 주네덜란드 대사(사진 중앙)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이준열사기념관
1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엄수된 이준 열사 순국 116주기 추모식에서 최형찬 주네덜란드 대사(사진 중앙)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이준열사기념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애쓴 이준 열사의 순국 116주기를 기리는 추모식이 2023714,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열사기념관에서 거행됐다. 이 자리에는 최형찬 주네덜란드 대사, 김학재 주벨기에 정무공사,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 송창주 이준열사기념관장과 교민들이 참석했다.

이준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116년 전, 헤이그 특사들이 여장을 풀었던 드용(De Jong)호텔이다. 특사들은 투숙하자마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게양했다. 당시 마이니치신문 고타로 기자는 헤이그 한국 대표들의 숙소에 태극기가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열기념관은 순국 장소인 드용호텔(가운데 건물)이다. 사진=이재표 기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열기념관은 순국 장소인 드용호텔(가운데 건물)이다. 사진=이재표 기자

특사들은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담한 태도로 비록 본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을 상대로 활발한 장외활동을 벌였다. 627일에는 각국 대표들에게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대한제국의 독립이 강대국에 의해 보장, 승인되었음을 주장하는 일종의 독립선언문을 전달했다. “왜 대한제국을 제외하는가?”로 시작하는 이 선언문은 기자단의 공동취재로 발간하는 만국평화회의보’ 630일 자에 실렸다.

그런데 특사 가운데 연장자였던 이준이 714일 저녁 7, 이 호텔에서 사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헤이그에서의 외교투쟁은 막을 내렸다.


1992년 신문 보고 매입 추진


2023년 광복절을 엿새 앞둔 89, 기념관을 찾아갔다. 송창주 관장은 남편인 이기항 원장과 함께 199585, 기념관의 문을 열었다. 평안도가 고향인 송 관장 부부는 1972, 남편인 이 원장이 한국수출진흥주식회사 로테르담 주재원으로 발령 나면서 네덜란드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고교 교사였던 송 관장은 화란(和蘭, 네덜란드) 한인학교 초대교장을 맡기도 했다.

송창주 관장은 1995년 기념관을 개관하고 소신과 열정으로 운영해 왔다. 사진=이재표 기자
송창주 관장은 1995년 기념관을 개관하고 소신과 열정으로 운영해 왔다. 사진=이재표 기자

1992714, 네덜란드 유력일간지 NRC에는 한 한국인의 죽음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85년 전의 죽음을 되짚으며 그가 순국한 호텔이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 부부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역사적 현장을 찾아갔다.

지은 지 300년이 넘는 건물이었어요. 1층에는 당구장이 있었고, 23층에는 집이 없는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어요. 네덜란드는 빈집에 들어가 일정 기간을 살면 전기와 수도를 연결해 주는 주거제도가 있거든요. 그대로 두면 독립운동사의 현장이 사라져버릴 처지였습니다.”

청년들은 설득해 내보냈지만, 건물의 우선 매입권이 임차인인 당구장 측에 있었다. 부부는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법률가 출신인 하버만스 헤이그 시장이다.

이준 열사가 묵었던 방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송창주 관장. 사진=이재표 기자
이준 열사가 묵었던 방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송창주 관장. 사진=이재표 기자

건물은 시() 소유라서 규정상 공지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시장이 취지를 이해하고, 우리가 매입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해줬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매입자금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도움을 받았다.

부부는 이준 열사와 관련한 자료를 찾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기관, 언론 기록을 뒤졌다. 그러면서 소장 자료도 하나둘씩 갖추게 됐다. 100주년인 2007년에는 서영훈 평화제전위원장, 고 김수환 추기경, 김재순 전 국회의장, 반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등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제전을 열기도 했다.


진천군의 공식 방문 바라


2006년에는 1층 세입자였던 당구장이 나가게 되면서, 처음 매입한 건물 일부 230에 더해 660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부부 모두 팔순을 훌쩍 넘겼지만 이준 열사를 향한 열정은 청춘이다. 지금도 관람객이 오면 송창주 관장이 직접 열변을 토하며 안내한다. 한 해 7000명까지 기념관을 찾았지만, 코로나 시기에는 문을 닫다시피 했다.

이준 열사가 순국한 바로 그 자리. 관람객들이 가져다 놓은 태극기 등이 놓여있다. 사진=이재표 기자
이준 열사가 순국한 바로 그 자리. 관람객들이 가져다 놓은 태극기 등이 놓여있다. 사진=이재표 기자

헤이그는 한국의 문화역사영토입니다. 특사들이 각국 대표에게 보낸 성명은 외교문서이자 첫 독립선언문이죠. 열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추적했지만, 실체를 밝히지 못했어요. 윌리엄 티 스테드 기자의 유품 중에서 만약에 일기를 찾을 수 있다면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송창주 관장은 충북에서 왔다는 기자에게 이상설 선생이 이준 열사의 장례 때 흰 한복을 입고 갓을 썼답니다. 진천군에서는 공식적으로 기념관을 찾지 않았어요. 이상설 선생이 입었을 한복 한 벌을 기증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천군에 그런 뜻을 전달하겠다고 대답했다. 기념관을 나오는데 인도 경계석에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한글이 음각돼 있었다.

이준 열사 기념관 앞 인도 경계석에 쓰여있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한걸음을 뗀 것은 맞지만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사진=이재표 기자
이준 열사 기념관 앞 인도 경계석에 쓰여있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한걸음을 뗀 것은 맞지만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사진=이재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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