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후 항일투쟁 동참 호소 ‘음성통문’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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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후 항일투쟁 동참 호소 ‘음성통문’ 첫 공개
  • 김영이 기자
  • 승인 2023.08.3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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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음성 거주 유학자·유지 주도 충북 최초 작성 발견
이상주 박사, 충북 유림들 항일의식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
반 씨 등 8개 성 15명 주도, 원본 찾기와 안내판 설치 절실

 

'수록(隨錄)' 8쪽 '陰城通文'- 조선말 항일의병사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자료인 음성통문. 충북에서 발견한 최초의 통문이다.
'수록(隨錄)' 8쪽 '陰城通文'- 조선말 항일의병사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자료인 음성통문. 충북에서 발견한 최초의 통문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 이듬해인 18961월 전국 유학자들에게 항일투쟁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음성통문(陰城通文)’이 발견됐다.

이는 조선말~일제 강점 시 충북에서 최초로 발견된 통문이다.

통문(通文)은 조선시대 민간이 결성한 단체나 개인이 같은 단체 또는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다.

이 통문은 1910년 한일합병 이전인 을미사변 이듬해 1896년 무렵 충북 유림들의 항일의식과 그 항쟁의식의 일단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음성통문은 한지에 먹물로 직접 글씨를 쓴 필사본인 수록(隨錄)에 실려 있다. 책의 크기는 가로 19, 세로 30로 분량은 앞표지를 제외하고 35쪽이다.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필사자가 받은 문건을 보관하다가 오랫동안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옮겨 베껴서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 1쪽에는 서사(誓辭) 병신 815(丙申 八月 十五日) 성력소치 2~3쪽 관동의장 이필희격문(關東義將 李弼熙)檄文) 4쪽 예안통문(禮安通文·지금의 경북 안동시에서 돌린 통문) 4~5쪽 안동통문(安東通文) 5~7쪽 재통(再通두 번 즉 재차 돌린 통문) 7~8쪽 진양통문(晉陽通文·지금의 경남 진주시에서 돌린 통문) 8쪽 음성통문(陰城通文·지금 충북 음성에서 돌린 통문) 8~11쪽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 12~23쪽 성리회통초략(性理會通抄略) 24~27쪽 갑신변복령후 시서사제자(甲申變服令後 示書社諸子) 27~35쪽 문행충신설(文行忠信說)을 담고 있다.

 

왜 음성통문을 돌렸나

 

음성통문은 국운이 중간에 열사의 기강이 쇠퇴해 안으로는 역신들이 권력을 희롱하고 밖으로는 원수도적들이 틈을 엿보아 마침내 국모(國母:명성황후)가 망극한 변을 당해 500년 종묘사직이 위태하고 삼천리강토가 문득 오랑캐 같은 경우가 된 점을 통곡한다고 적고 있다. 이어 앞 시대의 선사(先師)에게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모든 읍()들이, 장보(章甫:선비)들이 본디 정예함을 축적한 것을 합하고 스스로 충성스런 갑옷을 입고 투구와 용기를 믿고 의리로 나가면 어찌 맨 손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독려했다.

음성통문은 항상 변하지 않는 마음인 항심(恒心)을 바라고 성()의 배후를 이뤄 출전의 맹서를 하고 와신상담해 왕실의 부흥을 도모하게 다시 사도(師道)를 드러내자고 강조했다.

 

음성통문 발기인들은 누구?

 

음성통문 작성을 주도한 발기인은 전 군수 박해륜(朴海崙), 진사 안병희(進士 安炳熙), 성규용(成奎鏞), 남조영(南祚永), 어재운(魚在雲), 반기홍(潘基洪), 반장주(潘章周), 반종우(潘鍾羽), 최정묵(崔靜默), 최계영(崔啓榮), 이학재(李鶴在), 이희경(李喜境), 박신영(朴臣泳), 안영수(安瑛壽), 성재상(成載尙) 15명이다

반 씨 3, ····이 씨 각 2, ·어 씨 각 1명 등 당시 음성군 내 유학자와 유지들로 짐작케 하는 음성군 거주 8개 성 씨들이 동참 주도했다.

이들 중 반장주, 반종우가 태어난 마을은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다. 보천리 적암에 묘소가 있다. 반기홍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같은 항렬로 보천리에서 출생, 후에 전북 익산으로 이사 간 것으로 알려졌다.

박해륜은 조선왕조실록에 고종 29년 임진(1892) 88일 영평군수로 임명한 것으로 나와 있다. 1896년에 음성통문을 작성한 인물과 동일인이다.

음성통문이 수록된 수록(隨錄)이라는 책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고, 단지 평생 전통문화재를 아끼고 감식력이 뛰어난 인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음성통문을 공개한 이상주(전 중원대 교수) 한문학 박사는 일제 때는 음성통문 같은 항일 서한을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면 큰 화를 면치 못했다이런 시대에 낱장으로 받은 통문을 베껴서 책으로 묶었다는 것은 목숨을 건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음성통문 발기인 중 나머지 13명의 가계에 대해선 계속 추적, 파악하겠다낱장으로 된 음성통문 원본 찾기와 음성 반기문평화기념관에 조선말 항일투쟁을 실천한 음성통문에 대한 안내판이라도 설치해 음성지역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수록(隨錄)' 표지. 관동의병장 이필희 격문(關東義將 李弼熙檄文)
'수록(隨錄)' 표지. 관동의병장 이필희 격문(關東義將 李弼熙檄文)

 

 

<음성통문 한문(漢文) 원문>

 

右通告事(우통고사), 堯舜禹湯之道(요순우탕지도), 孔孟程朱之學(공맹정주지학), 爲天下萬世龜鑑(위천하만세귀감), 而稱我東小中華者(이칭아동소중화자), 上有列聖之繼承(상유열성지계승), 下有羣賢之傳受(하유군현지전수), 道斯道(도사도), 學斯學之由也(학사학지유야). 其大要(기대요), 則繼天立極(즉계천입극), 而神效(이신효), 則化民成俗(즉화민성속), 猗歟(의여), 盛矣(성의). 於不休哉(어불휴재).夫何國運中(부하국운중), 烈士紀降衰(열사기강쇠), 內而逆臣弄柄(내이역신롱병), 外而讐寇伺釁(외이수구사사), 竟遭國母罔極之變(경조국모망극지변), 忍受君父毁形之恥(인수군부훼형지치), 五百年宗社(오백년종사), 未免朝夕之危(미면조석지위), 三千里疆土(삼천리강토), 便作蠻夷之境(변작만이지경), 哭不可旣痛(곡불가기통), 復何如(부하여). 凡爲簪纓舊族(범위잠영구족), 復何如凡爲簪纓舊族(부하여범위잠영구족), 至若巖穴(지약암혈), 遺民生何衣冠(유민생하의관), 表丈夫於世上(표장부어세상), 死何面目先師於地下(사하면목선사어지하), 窃伏想列邑(절복상열읍), 合章甫素蓄積精銳(합장보소축적정예), 自有忠甲(자유충갑), 信冑勇赴義理(신주용부의리), 各賊志帥氣卒(각적지수기졸), 可跳白刃(가도백인), 何憂赤手(하우적수), 望恒心(망항심), 以成城肯(이성성긍), 而出戰誓(이출전서), 令薪膽指天(령신담지천), 肝腦塗地(간뇌도지), 期效首倡義陣(기효수창의진), 萬一之勞(만일지로), 俾圖王室之興(비도왕실지흥), 復得見師道之闡明(부득견사도지천명), 千萬幸甚(천만행심).

 

<음성통문 번역문>

 

오른쪽 통문에 알리는 일.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의 도()와 공자, 맹자, 정이(程頤)와 정호(鄭澔) 형제, 주자(朱子)의 학문이 천하만세의 귀감(龜鑑)이 되어 우리 조선(동방[東邦])을 소중화(小中華: 중국을 대신한 작은 중국)라 일컬어 위로는 열성조(列聖祖:역대의 훌륭한 임금)을 계승함이 있으며, 아래로는 여러 어진 분들 군현(羣賢)이 전수(傳受)함이 있으니, 사도(斯道:유학의 도)를 도로 여기고, 사학(斯學:유학)을 배운 데서 연유된 것이다. 그 큰 요점은, 즉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지극한 표준을 세워 신이한 효과가 있으니, 즉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완성하니 아름답도다, 성대하도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무릇 어찌 국운이 중간에 열사(㤠士)의 기강(紀綱)이 쇠퇴하여 안으로는 역신(逆臣)들이 권력의 자루 권병(權柄)을 희롱하고, 밖으로는 원수도적들이 틈을 엿보아 마침내 국모(國母: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망극한 변을 당하며, 차마 임금과 아버지가 그 머리를 깎는 신체를 훼손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오백년 종묘사직(五百年宗社)이 아직 아침저녁으로 위태로움을 면하지 못하여,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가 문득 오랑캐 같은 경우가 되어 통곡하나, 이미 고통이 불가하니 다시 어찌하리오. 무릇 높은 관직을 한 사람과 오래 살아온 가문이, 무릇 잠영구족(簪纓舊族)이 되어 지극히 바위굴속 암혈(巖穴)과 같으니 남은 백성의 생활이 어떤 의관을 입고 장부(丈夫)들이 세상에 드러나오고, 세상에 장부(丈夫)라고 드러내겠으며, 죽어서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앞서간 스승님(先師)을 대하겠는가,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니 모든 읍()들이 장보(章甫:선비)들이 본디 정예(精銳)함을 축적한 것을 합하고, 스스로 충성스런 갑옷을 소유하고 있으며, 투구와 용기를 믿고 의리(義理)에 나가, (:]은 마음을 먹는 것이니 기()의 장수요, ()는 사람의 몸에 있어 지()의 졸개()가 되니, 각각 지수기졸(志帥氣卒), 즉 뜻()과 기()를 적()으로 삼으면 각각 하얀 칼날을 밟는 것과 어찌 맨손으로 싸우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마음속으로 조장(助長)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농사에 비유하면, 잊는 것은 농부가 아예 밭을 돌보지 않는 것이며, 항상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은 마음인 항심(恒心)을 바라고 성()의 등짝을 이루어 출전의 맹서를 하여, 까칠까칠한 나뭇짐에 누워 쓸개의 쓴 맛을 보듯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하늘을 가리키고 간()과 뇌()를 땅에 발라, 우두머리 창의진(倡義陣)을 본받게 하는 것을 기대하여, 만분의 일의 노고로 왕실의 부흥을 도모하게 하여 다시 사도(師道)를 드러내 밝히는 것(천명:闡明)을 볼 수 있게 되면 천만 다행함이 깊을 것이다. <번역 이상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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