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 타오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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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 타오르미나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09.0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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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옛 극장들의 원형 잘 보존
몰라 성(Castello di Mola)에서 바라본 이오니아해와 에트나 화산. 사진=정연일
몰라 성(Castello di Mola)에서 바라본 이오니아해와 에트나 화산. 사진=정연일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은 배를 타고 척박한 그리스 땅을 떠나 지중해 곳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이 시기를 라틴어로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부른다. 식민도시는 특히 그리스 본토와 가까운 이탈리아 남부에 몰려있다. 나폴리가 대표적인 곳이다.

그리스인들이 건설했던 도시에는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시칠리아섬의 아그리젠토가 고대 그리스 신전으로 유명하다면, 타오르미나는 고대 그리스 극장이 유명하다. 타오르미나에도 여러 중세 건축물이 많지만, 압권은 고대 그리스 극장이다. 그리스 본토를 비롯해 지중해 일대에 고대 그리스 극장이 남아 있는 곳은 많지만, 타오르미나의 극장이 특별한 이유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기도 하지만 위치 때문이다.

몰라 성에서 바라본 타오르미나, 붉은 사각형 안이 고대 그리스 극장. 사진=정연일
몰라 성에서 바라본 타오르미나, 붉은 사각형 안이 고대 그리스 극장. 사진=정연일

타오르미나는 이오니아 해안의 펠로리타니 산맥 남쪽 경사면에 있는 해발 250m의 가파른 산자락에 있다. 가파른 산자락에 타오르미나가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잦은 전쟁 때문이었다. 화약과 대포가 등장하기 전에는 높은 곳이 방어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맑은 날 타오르미나의 반원형 고대 그리스 극장의 관람석에 앉으면 무대 너머로 푸른 이오니아해와 눈 덮인 에트나 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스 본토와 지중해 일대의 고대 그리스 로마 극장을 꽤 다녔지만, 극장 주위의 경치는 타오르미나가 으뜸이다.

타오르미나와 몰라 마을을 잇는 도로
타오르미나와 몰라 마을을 잇는 도로

타오르미나라는 지명은 그리스어로 소를 뜻하는 타우로(Taur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타오르미나가 자리 잡은 곳의 산이 바다에서 보면 마치 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타오르미나에서 숙박하는 여행자도 있지만, 보통 카타니아에서 머물며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사람들도 많다. 카타니아에서 아침 일찍 서두르면 여유 있게 보고 저녁 무렵에 다시 카타니아로 돌아올 수 있다.

타오르미나 여행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다. 타오르미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몰라 성(Castello di Mola), 산 중턱의 타오르미나, 그리고 이오니아 해안의 아름다운 섬 이솔라 벨라(Isola bella). 가장 높은 곳인 몰라 성에서 시작해 가장 낮은 곳인 이솔라 벨라섬에서 끝내고 기차를 타고 다시 카타니아로 돌아오는 코스가 좋다.


몰라는 어금니라는 뜻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섬 상륙일을 기념하는 4월9일 광장.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섬 상륙일을 기념하는 4월9일 광장.

카타니아에서 출발한 버스는 한 시간 조금 남짓 고속도로를 달리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든다. 타오르미나로 가는 길이다. 지그재그로 난 길을 한 참 오른 버스가 도착한 곳은 타오르미나 버스 터미널, 이곳에서 다시 몰라 성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몰라 성으로 가는 길은 타오르미나로 오른 길보다 더 가파르고 굴곡도 심하다.

버스가 길 모퉁이를 돌 때 마다 푸른 이오니아 해가 점점 더 넓게 눈에 들어오지만, 창 밖으로 길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한참을 오른 버스는 아주 산꼭대기 마을의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버스의 종점인 몰라 성이다. 마을 이름도 몰라다.

광장에서 내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더는 오를 곳이 없는 곳이 나온다. 몰라 성이다. 푸른 이오니아해와 흰 눈이 덮힌 에트나산, 그리고 타오르미나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러 번 주인이 바뀐 몰라 성은 폐허에 가까운 유적이라 성 자체는 크게 볼 게 없지만, 전망과 풍광이 압도적이다.

타오르미나의 기념품 가게의 대부 프린트 티셔츠.
타오르미나의 기념품 가게의 대부 프린트 티셔츠.

몰라(Mola)라는 단어가 한국어 몰라를 연상시켜 뜻을 찾아보니 어금니이다. 연마석이라는 뜻도 있다. 산봉우리 꼭대기 어금니처럼 비교적 평평한 곳에서 자리 잡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쳐들어오는 적들을 연마석처럼 갈아버렸다는 뜻일까? 몰라라는 이름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몰라 마을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아주 작은 마을이고 타오르미나와 몰라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대중교통인 버스는 한 시간 간격으로 있지만, 풍경과 전망이 이 모든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마을 자체도 아름답다. 몰라 성에서 내려와 타오르미나로 내려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일행 중에서 성격이 급한 이들은 타오르미나까지 걸어서 내려간다. 걸어서 내려간 사람들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오르미나 행 버스가 왔다. 무릎이 아프거나 걸음이 불편해 남은 사람 몇과 같이 버스를 타고 타오르미나로 내려갔다.


49일 광장의 작명 유래는?

 

세라믹으로 표현한 타오르미나.
세라믹으로 표현한 타오르미나.

타오르미나는 좌우로 길게 산자락에 자리했다. 동쪽의 메시나 문과 서쪽의 카타니아 문을 통해 타오르미나 구시가로 들어갈 수 있다. (Porta)의 이름은 문에 붙은 도시의 방향이다. 메시나 문은 메시나 방향, 카타니아 문은 카타니아 방향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도 쓰이는 룰이고, 특히 기차역 이름을 붙일 때도 쓰인다.

서쪽의 카타니아 문을 통해 구시가로 들어서면 먼저 타오르미나 대성당(Duomo)이 나온다. 이탈리아의 여러 대성당에 비하면 크기는 작지만, 첫눈에 봐도 매우 오래됐음이 느껴진다. 연혁을 찾아보니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월이 흐르며 시칠리아섬의 지배자가 바뀌면서 애초의 건물에 여러 양식을 후대에 덧붙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성당을 지나 고대 그리스 극장이 있는 메시나 문 방향으로 걷는다. 상점과 카페가 어깨를 잇대고 있는 중심거리이지만 차량 진입은 불가능한 좁은 보행거리다. 5분 정도 걷다 보면 전망이 탁 트인 광장이 나온다. 49일 광장이다.

타오르미나 고대 그리스 극장의 내부.
타오르미나 고대 그리스 극장의 내부.

광장의 이름에 날짜가 붙은 이유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인 가리발디 장군이 1860년에 시칠리아섬에 상륙한 날이다. 타오르미나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중에 소식이 전해져서 미사가 중단되었다고. 이탈리아의 통일은 북부가 주도했다. 남부는 흡수통일을 당한 셈이다. 광장의 이름에 49일을 붙인 이유는, 가리발디의 상륙을 환영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잊지 말자는 뜻일까 궁금해진다.

4월이지만 맑은 날 시칠리아의 태양은 뜨거워 타오르미나의 거리를 걷다 보면 태양이 타오른다는 느낌이 든다. 49일 광장에서 메시나 문을 향해 계속 걷다 보면, 고대 그리스 극장(Teatro Creco)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부채꼴 모양의 계단식 야외극장과 극장 너머로 이오니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문물을 익히던 그랜드 투어 시절의 인기장소였으며, 귀족뿐만 아니라 괴테를 비롯해 근현대의 여러 예술가가 찾았던 곳이다. 1월에도 타오르미나의 평균기온은 섭씨 11도 정도라, 겨울이 길고 추운 중북부 유럽 사람들이 겨울나기에 딱 좋기도 했다. 여행이 대중화된 지금은 한여름에 사람이 가장 많지만, 과거에는 가을에 호텔을 열어 봄까지 영업을 하고 닫았다고.


그리스와 로마 온과 움의 차이

 

고대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흡수해 자양분으로 삼았기에 여행자의 시각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다. 건축으로 따지면 그리스는 으로 끝나고 로마는 으로 끝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과 로마의 콜로세움을 떠올리면 기억하기 쉽다. 대한민국의 온 과 움으로 끝나는 아파트 브랜드가 있기도 하다.

그리스식 공연장은 오데온(Odeon)과 테아트론(Teatron)이 있다. 오데온은 노래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주로 시 낭송이나 노래와 음악 공연을 위해 지은 공간이다. 음악 재생기기인 오디오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유럽의 주요 도시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도 오데온이라는 이름의 공연장이 있다.

반면 테아트론은 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주로 고대 그리스 연극을 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오늘날 영어로 극장을 뜻하는 ‘Theater’의 어원이기도 하다. 오데온과 테아트론을 각각 따로 만든 곳도 있지만 하나로 같이 사용하는 곳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테아트론이 오데온 보다 조금 더 크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다녀본 곳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다음으로 여행자가 많이 혼동하는 것은 극장과 원형경기장 그리고 대전차 경기장이다. 고대 극장 또는 공연장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검투사들의 원형경기장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오데온이나 테아트론은 반원형인 반면에 원형경기장(amphitheater)은 말 그대로 원형이다. 오늘날의 스타디움에 가깝다.

영화 벤허에 등장하는 대전차경기장은 지금은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다. 오늘날의 경마장과 구조가 비슷하다. 극장과 공연장 원형경기장과 대전차 경기장은 제각각 모두 용도는 달랐지만, 현대의 건축 구조에도 큰 영향을 줬다. 현대의 극장 공연장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극장 공연장의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다. 크기에 따라서 수용인원은 다르지만,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한꺼번에 쉽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게 설계가 되었다.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은 1만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이크와 앰프가 없었던 고대에 사람의 육성을 관객석 멀리까지 전달하기 위해서는 좌석을 계단식으로 만들고, 계단마다 반사판을 부착해 음향의 반사를 이용했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9월 아프리카여행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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